[茶와 茶文化] 6. 불교의 茶禪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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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와 茶文化] 6. 불교의 茶禪一味
  • 승인 2005.04.0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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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곤 (쌍계제다 대표)

알 속의 병아리가 탄생의 시간이 다가오자 알 속에서 미세하게 껍질을 쫀다. 어미닭도 밖에서 정확하게 같은 곳을 쪼아, 병아리에게는 지금까지의 전부였던 알을 깨부수고 새 세상으로 인도한다. 안에서 쪼는 것을 줄(줄)이라 하고 밖에서 쪼아 주는 것을 탁(啄)이라하니, 줄탁(줄啄)은 둘이 함께 행하여야 이룰 수 있음을 뜻하는 오묘한 생명탄생을 이르는 말이었다. 선가(禪家)에서 제자의 공부를 점검하고 의문을 꼭 맞는 방법으로 가르쳐 도(道)에 인도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옛날 선종의 조사(祖師)들은 제자들이 화두(話頭) 타파의 극점까지 와 있을 때, 깨달음 가까이에서 답답해할 때, 상식적으로 상상 할 수도 없는 고함이나 매질, 동문서답 등으로 활연대오(豁然大悟)의 기폭제를 제공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조주선사의 차(茶), 마조도일의 고함과 욕설(喝), 덕산의 몽둥이(棒) 등이 있었다. 제자와 스승이 이런 극단적인 방법으로 줄탁함으로 서로 상응(相應)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차로서 제자들을 도로 인도한 선사로 중국의 조주종심(趙州從심 778~897년)과 조선의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년)이 유명하다.

♠ 끽따거(喫茶去)와 점다래(點茶來)

120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고불(古佛), 또는 하북의 조주(趙州)지방에서 선을 휘날렸다하여 조주라 불리웠던 조주선사는 도를 묻는 누구에게나 “차나 마시게(喫茶去)”하였다. 조주의 관음원(觀音院)에서 손님을 맞이하면서, 한 중에게 물었다.
‘전에 여기 와 본적이 있는가?’
‘네 있습니다.’
‘그럼 차나 한 잔 마시게.’

또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와 본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마시게.’
곁에 있던 원주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와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그만 두고라도 무엇 때문에 와 봤다는 사람에게도 차를 마시라고 하십니까?’
스님이 ‘원주야!’ 하고 부르자 원주가 ‘예’ 하고 대답하자 ‘자네도 차나 한 잔 하게.’
그 유명한 끽따거 화두로 茶가 道이고, 차가 도에 이르게 하는 길이자 차를 마시듯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임을 강조한 것이다.

벽송당은 전북 부안 출신으로 무예를 좋아하며 무과(武科)에 뽑혔고, 여진족이 침입했을 때 허종(許琮) 장군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28세에 출가하고 직지사 벽계정심(碧溪淨心)의 법을 이었다. 이후 지리산 화개동의 의신사(義神寺)에서 선을 선양하고 교(敎)를 담론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선사는 설법을 하면서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결론을 강조할 때, 깨침에 줄탁이 필요할 때 곧잘 차를 이용하였다.

한번은 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을 할 때였다. 이제 게송을 지어 읊고, 설법을 마치려 할 때였다. 선사는 불자(拂子)를 들어 한 번 휘두른 다음 시자(侍子)를 불렀다. “차를 따르라(點茶來)” 한참을 묵묵히 앉았다가 게송을 읊는다.

푸른 대는 바람 때문에 더욱 곧고 (翠竹和風直)
붉은 꽃은 이슬 머금어 더욱 향기롭도다 (紅花帶露香)

1534년 겨울, 화개동의 수국암(壽國庵)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설하고 있었다. 문득 크게 탄식하기를
“대개 모든 법에서 적멸상(寂滅相)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 이제 너희들도 만일 부처님의 말없음을 믿으면 곧 자가심지(自家心地)를 깨칠 것이다. 오늘은 노승도 또한 너희들을 위해 적멸상을 보이고 가리라. 너희들은 밖을 향해 구하려 말고 마음 깨치기를 힘써라.”

말을 마치자 시자를 불러 “점다래” 하고 단정히 앉아 문을 닫았다. 한참동안 잠잠하여 제자들이 문을 열고 보았을 때는 이미 입적(入寂)한 뒤였다. 선사의 나이 71세 였고, 스님이 된지 44년 이었다. 쌍계사에 부도가 남아있다.
벽송당은 차의 고향 화개동에서 차를 따르게 하고 지리산 스님들에게 차로써 적멸상을 가르친 것이다.

♠ 서산대사와 다선일미(茶禪一味)

서산대사(1520~1604년)는 15세 소년으로 지리산에 유람왔다가 화개 의신동(義神洞)에서 스님이 되어 전후 20년을 화개에서 살았다. 화개의 신라고찰 내은적암(內隱寂庵)을 중창하고 너무나도 좋아서 “청허원(淸虛院)”이라 하고 스스로 청허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청허원에서 대표적인 저술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집필하고 화개동을 노래한 많은 시와 글들을 남겼다.

중 대여섯
내 암자 앞에 절을 지었네
새벽 종에 같이 일어나고
밤 북에 같이 잔다네

시냇물에 달을 함께 길어
차 다리니 푸른 열기 나뉜다.
날마다 무슨 일 의논하는가
염불과 참선이라네

‘두류산 내온적암’이다. 대사는 “마음의 고향”이자 우리나라 “차의 고향”인 화개에서 스님들이 매일하는 일은 차 끓이고 염불하며 참선하는 것이라 노래하고 있다. 즉 “다선일미” 사상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서산대사는 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씀이라고 선교의 진수를 한마디로 경쾌하게 정의하였고 이능화는 “조선의 선교사”에서 “서산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조선불교는 순도와 아도에서 시작하여 함허와 서산이 완성하였다.”고 찬양하였다.
서산대사는 화개동에서 수행자를 위한 ‘선가귀감’을 지었고, 수행자의 다풍(茶風) - 다선일미를 생활화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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