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239] 萬病回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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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239] 萬病回春
  • 승인 2005.04.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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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業의 대명사, 萬病回春

구한말까지만 해도 저자거리의 약방에 ‘萬病回春’이니 ‘神農遺業’과 같은 문구를 적은 깃발이나 간판을 매달아 醫業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즉, 이런 문구가 의료업을 표방하는 대명사로 쓰였다는 것인데, 神農은 농업신이기도 해서 ‘신농유업’은 종종 農旗에도 자주 등장하는 구절이다. 하지만 만병회춘이야 오갈 데 없이 의약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데 보통 ‘起死回生, 萬病回春’이라고 병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보다는 공廷賢의 대표 명저인 『만병회춘』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공정현은 태의원 의관이었던 공信의 아들로 처음에는 과거 공부에 매달렸으나 여러 차례 낙방하자 벼슬길을 버리고, 어진 재상이 백성을 따뜻하고 배불리 먹도록 하듯이 훌륭한 의원이 되어 병든 이를 치료하여 살리고자 맘먹었다. 저자의 서문을 보면 애써 회춘의 의미를 재삼재사 강조하고 있는데, ‘봄을 만나 만물이 생기를 얻는 것처럼 병자가 회생하여 천수를 다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훌륭한 의원이 어진 재상과 동렬에 놓일 수 있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며, 이를 입증하듯 스스로 93세의 장수를 누렸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어느 책 못지않게 많이 읽혔던 책 중의 하나이다. 『동의보감』에는 이 책(‘回春’)이 무려 462조나 인용되어 있다고 하니 얼마큼 비중 있게 다루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책에 실린 약성가는 『제중신편』의 약성가에 모범이 되었으며, 후에 『방약합편』의 損益本草에 이르기까지 조선 의가들의 애송시가 되었다. 특히 황도연이 지은 약성가에는 같은 저자의 다른 책인 『수세보원』과 이 책의 약성가에서 303수를 고르고 『제중신편』에서 새로 더한 80수에다가 또 다시 황도연이 73수를 더하여 총 514수가 되었다.

醫學源流를 보면 전설상의 의약신인 神農黃帝로부터 시작하여 雷公, 扁鵲, 淳于意, 張仲景으로 이어지는 명의와 華타와 王叔和, 皇甫謐, 葛洪, 孫思邈을 嫡傳으로 삼았으며, 慈藏 藥王을 佛家의 의약신으로 덧붙여 놓았다. 劉張朱李를 역대명가와 병칭하거나 ‘各擅專門’이라 말한 것을 보아 金元시대 이전의 계통만을 밝혔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후기 갑인활자로 인쇄한 판본이 있는데, 1772년(영조 48) 甲寅字를 주조하여 이 책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숙종조에 韓構字로 찍은 판본이 기록되어 있다. 또 영조실록에는 1753년(영조 29) 영의정 金在魯가 『동의보감』과 『증보만병회춘』을 嶺營에서 간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앞서 숙종조에 한구자로 인출한 판본을 뒤엎어 다시 새긴 목판본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훗날 일본으로 전해져 거듭 간행되었는데, 조선판의 『回春』이나 『증보만병회춘』을 飜刻하여 사용하였다. 8권본과 10권본이 전하는데, 어느 때 누가 증보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후대의 『증보문헌비고』·예문지에는 ‘증보만병회춘 10권’이라고 되어 있다. 저술시기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저자의 自序에는 ‘萬曆乙卯’로 되어 있으며 이는 1615년에 해당하는데, ‘乙酉’(1585년에 해당)의 오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金陵 周氏 중간본에 ‘萬曆丁亥’ 즉 1587년에 저자가 서문을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소 강변하는 것 같지만 추정 시기는 대략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대해서도 이경화와 강명길 등은 공정현으로 기록하였고 주명신과 정약용, 이제마 등은 아버지인 공信의 저작으로 보았다. 대략 1587년에 공정현에 의해 8권으로 만들어 나오고 그 뒤 江蘇 사람 何應璧이 증보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이 책의 판본만 해도 30여종에 이른다고 하는데, 주로 조선에서 쓰인 것은 앞의 세 가지 중에서 뒤의 두 가지 刊本이다. 여하튼 아주 이른 시기에 조선에 전입되어 널리 읽혀졌던 것이 분명하며, 『동의보감』을 비롯하여 『의문보감』, 『제중신편』, 『마과회통』, 『의종손익』, 『동의수세보원』 등에 두루 쓰였다. 조선 후기 『醫學入門』, 『醫學正傳』과 함께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영향을 끼친 明代 의서 세 가지 중에 하나로 꼽힌다.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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