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와 茶文化] 5. 고려, 혹독한 茶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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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와 茶文化] 5. 고려, 혹독한 茶세금
  • 승인 2005.03.1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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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곤 (쌍계제다 대표)


♣ 차 소비의 증가

신라 하대. 장보고의 든든한 제해권과 해상무역의 독점으로 신라는 당나라와 모든 방면에서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구법유학승들에 의해 선종(禪宗)이 들어오게 되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형성되고, 선종과 함께 차문화도 흥성하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불교를 더욱 숭상하여 범국가적인 제전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가 열릴 때는 물론이요,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왕자가 태어났을 때, 태자를 책봉할 때, 공주를 시집보낼 때,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 등 국가적인 예식에 모두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이 모든 궁중 다례에서 차와 꽃·과일·약을 담당하는 다방(茶房)을 설치하였고, 왕의 순행(巡幸)에서 차 일을 담당하는 차군사(茶軍士)가 있었다.
민간에서도 차를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다점(茶店)이 생기고 중국차를 파는 상점과 엉터리 차행상까지 생겨나는 등, 차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궁중에서 차의 수요가 증가하고 민간에서도 음다풍속이 확산되자 차의 수급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 花開茶所의 차공납

당시 유명한 차의 산지였던 지리산 화개동에 다소(茶所)가 있었다. 지역 명에 향(鄕)·소(所)·부곡(部曲)이 붙은 지역은 특별한 토산물이 생산되거나 특정한 기술이 있는 자들을 모여 살게한 곳이다. 그 특산물이나 생산품을 공납하게 하는 제도가 신라 때부터 있었다. 화개부곡은 차를 만들어 바치던 다소가 있던 곳으로 차의 진상은 조선조 말까지 계속되었다.

고려 때 화개다소의 차 따는 시기와 차의 종류 품질, 노역에 종사하는 주민의 고통, 개경에 공납하는 방법과 시기 등을 상세히 보여주는 장편 시(詩) 5편이 전하고 있다.
모두 백운 이규보(白雲 李奎報 1168~ 1241년) 선생의 시로 [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시와 술, 거문고를 너무나 사랑해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 불리었고 차도 좋아해 차문화, 특히 지리산 화개차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겨 당시의 차생활에 대해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화개차는 진상품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임금님께 먼저 드리기 위해 “험한 산중에서 간신히 따 모아 머나먼 서울까지 등짐으로 져 날랐네.”라 하였다.
둘째, 차는 섣달에 좁쌀 같은 어린 순만을 따서 덩이차로 만들었다.
셋째, 차는 임금의 하사품이기도 하였다. 서울의 부귀한 재상도 얻기 어려운 차를 고승 대덕에게 예물로 보내기도한 기록이 있다.
넷째, 화개차는 색향기미(色香氣味)가 빼어나 선생이 유차(孺茶)라 이름하였다. 향기는 코를 찌르고 색깔과 달콤한 맛은 빼어났다. 특히 향기가 갓난아기의 배냇향 같은 젖 냄새가 나는 최상품이었다. 하사받은 선사도 차마 마시지 못하고 아끼며 깊이 간직했다고 한다.
다섯째, 차풍류(茶風流)도 즐겼다.
여섯째, 차의 부역이 혹독하였다. 관에서 노약자까지 강제로 징발해서 노역을 시키니, 험준한 산 속에서 맹수의 두려움에 떨면서 야생차를 따고 추위에 손을 불면서 차를 만들어 머나먼 개경까지 등짐으로 져다가 궁궐에 바쳤다.
선생은 차세금이 없어지면 백성들은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 화개차는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니
수 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졌다네. …
일천가지 망가뜨려 한 모금 차 마련하니…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게나.
산과 들의 차나무 불살라 차세금 금지한다면
남녘 백성 편히 쉼이 이로부터 시작되리라.

고려시대에도 지리산 화개차는 재배하지 않은 산야의 야생차였다. 섣달에 따서 납전차(臘前茶), 지금의 잎차 형태가 아닌 고형 덩이차라 단차(團茶)라 하였다. 이규보선생은 갓난 젖먹이 같은 향이 난다하여 유차라 이름하였다.

♣ Tea Time과 茶時

17세기 동양의 홍차가 유럽에 전해지고, 곧 설탕과 함께 진귀하고 사치스러운 기호품이 되었다. 신비로운 동양의 홍차에 브라질 설탕을 넣어 마시는 것은 상류층의 취미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러한 홍차문화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의 티타임을 갖게 하고 점차 정시화 되어갔다.

산업혁명으로 경제가 발전하자 중산계층까지 티타임이 일상화되어 18세기 중반에는 중산층 가정들이 생활비의 1할을 홍차와 설탕구입에 사용하기까지 하였다. 조명이 발달하고 생활이 나아지면서 저녁식사 시간이 늦어지니, 점심과 저녁 사이의 “애프터눈 티”가 대표적인 티타임으로 발전하였다.

티 테이블에 화려하게 차려진 티 세팅 - 고급 다구와 각종 다식(tea foods)과 각종 사교적인 여흥들에 영국 전체가 열광했다.
티타임은 유럽, 특히 영국의 아름다운 생활양식이 되었고 홍차 문화의 진수가 되었다. 그래서 영국에는 전쟁 중이거나, 부부 싸움 중이거나를 떠나 티타임만 되면 찻물 끓이는 소리가 요란하다는 유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때 사헌부에 다시(茶時)가 있었다. 사헌부는 오늘날 경찰과 비슷한 일을 했는데,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고 풍속을 바로 잡고 억울한 백성을 풀어주었다.
사헌부의 관리들이 매일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는 시간 - 다시를 가졌다. 이 제도는 조선 고종 때까지 이어졌다. 죄를 논하는 사헌부 관리들이 차의 머리를 맑게 하는 효능을 빌어 공정하고 올바른 판결을 하기 위함이었다.

조정에서는 중형주대의(重刑奏對儀)라는 제도가 있었다.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 할 때 임금과 신하가 마주보며 다례를 행하는 것이다. 참형(斬刑) 등의 극형을 내리기 전에 차를 앞에 놓고 다시 한번 신중하고 공정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바르고(中正) 치우침 없으며(中庸) 삿되지 않은(思無邪) 차의 정신으로 다짐하는 또 다른 의식이었으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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