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친구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문제가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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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친구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문제가 되나요?”
  • 승인 2024.03.2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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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현 기자

박숙현 기자

sh8789@mjmedi.com


영화읽기┃베탕쿠르 스캔들: 상속녀, 집사 그리고 남자친구
감독: 바티스트 에체가라이, 막심 보네
감독: 바티스트 에체가라이, 막심 보네

경제, 정치 시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베탕쿠르’라는 이름은 익숙하겠지만 혹자는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레알’이라는 이름을 듣는다면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리라.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릴리안 베탕쿠르는 아버지가 키워낸 로레알그룹을 상속받은 재벌 중의 재벌이다.

이정도 부자라면 대개 모든 돈이 들어갈 만 한 이야기에 스케일이 클 수밖에 없는데, 릴리안 베탕쿠르의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진사 친구와 오랫동안 친목을 다지면서 함께 유럽여행도 떠나고, 피카소를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작가들이 그린 초고가의 그림을 아무렇지 않게 덜컥 선물했으니 말이다. 이에 사람들이 이 친구 바니에가 순수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베탕쿠르의 돈을 탐내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하자 정작 당사자인 베탕쿠르는 태연하게 말한다. “친구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문제가 되나요?”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에게 소소한 선물을 하는 것은 그저 작은 호의일 뿐이다.

문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 그러니까 베탕쿠르에게 자신을 아들로 입양해달라고 요구하면서부터였다. 한국의 작은 상가 하나만 있어도 재산싸움이 나기 마련인데, 하물며 이런 슈퍼리치의 재산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속물에게 절반가량 넘어갈 상황이 되었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릴리안 베탕쿠르의 외동딸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예는 바니에를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바니에가 베탕쿠르에게 받아간 혹은 몰래 훔쳐간 금액이 9억 1700만 유로(19일 환율 기준 약 1조 3339억 원)였다. 참고로 1조원이란 하루에 1000만 원씩 쓸 경우 약 270년이 걸리는 액수다.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250억 자산가 노인의 딸로 입양된 요양보호사와 가족의 갈등이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베탕쿠르의 이야기는 그보다 돈의 단위가 조금 큰 이야기인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이 사건의 시초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소송 과정에서 베탕쿠르와 베탕쿠르가 접견한 수많은 사람들(지인, 자산관리인, 집사 등)의 이야기가 담긴 녹음본이 공개되었는데, 이 녹음본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에게 불법선거운동자금을 제공했으며, 스위스은행을 통해 외국으로 돈세탁을 하고, 거액의 탈세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베탕쿠르 저택의 집사가 사이드테이블에 몰래 작은 녹음기를 숨겨 녹음한 것인데, 수개월에 걸쳐 방대한 내용의 녹음이 진행됐다. 녹음본이 담긴 CD만 수백 장 분량이었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이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의 인터뷰와 당시 녹음본, 그리고 녹음본을 토대로 연출한 영상으로 이뤄져있다. 즉,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오디오는 대본이 없는 발언이다. 이때부터 바니에를 둘러싼 어느 부자모녀의 싸움은 뒷전으로 물러났고, 사건은 훨씬 정치적으로 중요해졌다.

다큐멘터리는 이 이야기를 실제 집사가 녹음한 녹음본 위주로 전개하면서 동시에 릴리안 베탕쿠르라는 인물이 왜 물주가 되었는지 배경을 소개한다. 기본적으로는 탈세와 불법선거운동자금제공 등의 범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기 때문에 “사실 그에게도 이런 사연이 있었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위험한 접근이기는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면 일부분은 이해가 되기는 한다. 재벌이라는 본질을 제외하고 바라보면 평생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거의 쌓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아온 한 노인에게 일어난 비극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작진은 이러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점은 이해하지만, 이 부분에 보다 중점을 두고, 개인의 사사로운 비극이나 자극성을 넘어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재발을 막기 위한 메시지를 던져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박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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