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3] 오세붕(홍콩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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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3] 오세붕(홍콩한의원장)
  • 승인 2005.01.28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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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서 한방침술의 우수성 전파
이젠 유럽 침술 수준 무시 못해

■ 인술 45년에 어느덧 고희

“벌써 70이라니 마음은 아직도 청춘인데... (인생이)허무하구만. 허허…….”
어느덧 인술실천 반세기를 맞은 朋友 오세붕(70·경기 고양시 홍콩한의원장) 선생은 지나온 세월에 허무함을 느낀다고 했다. 45년 간 많은 사람들에게 인술을 베풀어 왔지만 정작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가르며 서울에서 두 시간 여 걸려 도착한 일산 한의원. 조용한 분위기의 환자 대기실 한쪽 벽면엔 젊은 시절 그의 다양한 활약상들을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은 사진게시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세붕 선생은 원로로서는 보기 드문 복수 면허자이다.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한 1959년 한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입학보다 졸업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이태리 제노바 국립의대를 졸업해 81년 이태리 의사면허도 취득했다. 또 이듬해인 1982년에는 한국에서 정식 의사면허(이태리 의대 자격인정)까지 취득해 그에겐 의사면허가 모두 세 종류나 된다.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는 한, 양방의 면허를 다 가지고 있는 만큼 합리적이면서 조화로운 의술을 추구하지만 그래도 의학의 근간을 이루고 더욱 애착이 가는 학문은 ‘한의학’이란다.

■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다

부친도 의사와 의생(지금의 한의사)면허를 동시에 가진 복수면허자로 경기도 안성에서 ‘미양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30년 간 한·양방을 아우르며 인술을 펼친 의료인이었다. 그의 기억속에 자리잡은 부친은 늘 환자에게 인간적이고, 극빈자에게는 무료로 인술을 베푸는 자상한 모습의 친절한 의사로 남아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도 흰 가운을 입고 인술을 베푸는 부친의 모습은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다. 의료인으로서 대를 잇겠다는 그를 흐뭇해하던 부친은 “의사이기 이전에 인술을 베푸는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면서 “늘 환자를 내 가족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1959년 나이 스물넷의 다소 이른 나이에 경기도 파주에서 한의원을 처음 개업했을 땐 환자들이 그를 약제사나 조수쯤으로 잦은 오인을 하곤 해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이후 전남 장성군 삼서면에서 2년 간 공직의사로 근무하던중 지금의 부인 박정자(69)여사를 만나 결혼하면서 단란한 가정도 꾸렸다. 의무기간을 마친 뒤에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개원해 하루 수십명의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7년여의 시간을 보냈으며, 그의 생활도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에 선생은 특히 난치성 질환 치료에 두각을 나타냈다. 침과 한약을 써서 주로 ‘안면신경마비(구안와사)’를 많이 고쳤다고 한다.

■ 이태리에서의 잊지 못할 10년

20대의 청년 한의사로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던 어느 날, 그에게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이태리 밀라노 정신의학계의 권위자였던 코리니 박사가 한국의 한의학을 알고 싶다며 그를 초청해 온 것.

좋은 기회이긴 했으나 불혹의 나이에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가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1974년 그는 가족의 격려에 힘입어 낯선 세계로의 문을 두드린다. 이태리로 떠난 선생은 밀라노에 있는 물리치료소 사립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처음엔 2년만 있을 예정으로 떠났으나 새로운 의술을 공부하고 싶은 학술적 욕구가 솟구쳤다. 결국 제노바 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오전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2~3 군데의 개인병원에서 침술을 이용한 치료를 하는 등 이중생활을 해야만 했다. 처음엔 언어 때문에 어려움도 겪었고, 낯선 나라에서의 진한 외로움과 고독 때문에 힘든 시간들을 보내적도 있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국 생활에서의 정취와 고독, 생활의 느낌을 담은 일기를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이것이 후에 회고록을 내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단다. 이태리 사람들에게 선생은 외국인일 뿐이었지만 환자들이나 이웃 주민들에게는 인종차별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도또레(친절한 의사)’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이렇게 선생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방의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등 이태리 사람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4년 그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이태리에서의 추억을 남기고 서울로 돌아왔다. 10년 동안의 학업과 진료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동서한방병원측의 초청으로 한방부원장 겸 양방병원장을 맡게 되었다. 그때부터 바쁜 진료활동은 다시 시작됐다. 93년엔 광동한방병원 병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렇게 동서한방병원에서 10년, 광동한방병원에서 5년을 쉼 없이 일에 매달리다 보니 그만 선생의 몸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60을 조금 넘긴 나이에 본태성고혈압에 가벼운 중풍으로 좌 상지마목 등 목 디스크라는 병명을 얻었고, 거기다 비록 가벼운 증상이긴 했지만 파킨슨병, 전립선비대증, 안면신경마비까지 자신이 환자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서울아산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치료를 받았고, 다행히도 한 달 반 만에 안면신경마비 증세는 완치될 수 있었다.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을 그만둔 선생은 가능한 심신을 편안히 하고 조심하면서 6개월 간 한방치료와 양방치료, 물리치료, 침술치료 등을 꾸준히 지속했다. 그런 결과 건강은 차츰 호전되기 시작했고, 99년 10월 일산에 지금의 한의원도 개원할 수 있었다.

고희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일주일에 목·일요일 이틀을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아침 9시30분부터 오후6시까지 혼자서 진료에 임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이 많이 약해진 탓에 하루에 보통 10~20명 정도의 환자만 진료한다고 했다.

■ 인술 반세기 회고록 펴내

최근 선생은 그의 지난 인술외길 반세기를 담은 ‘한의사·의사 오세붕 회고록’(뿌리 刊)을 펴냈다. 60세를 넘을 때까지 고혈압, 중풍 등 성인병 치료에 있어 전문 의학박사로 어느 정도의 명성도 얻었고, 또 30년 간 각종 기업체와 연수원, 학교와 종교단체 등에서 ‘성인병과 자연식’을 주제로 한 초청강의도 수백번 했다. 그러나 정작 선생 자신이 그런 병에 걸리고 보니 참으로 허무함을 감출 수가 없더란다.

그는 “76년 국내에 소개한 금연침은 이태리에서는 훨씬 이전에 개발돼 사용되던 침술”이라면서 “침구학은 동양의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닌 세계의학”이라고 했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 등 서양에서도 많은 의사들이 침구를 공부해서 환자를 진료하는데 상당히 수준급이고, 금주·금연침은 물론 심지어 마약중독 환자까지 침술로 관리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 지금 유럽의사들의 침술은 무시 못할 수준이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배우러 가야할 정도로 발달된 면도 있다면서 한의계 후배들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진출을 위해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한편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의료일원화 문제에 대해서는 “양방의사들은 한의학을 일개 분과로 생각해서 흡수하려 드는데 한방은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의 동등한 자격으로서 일원화가 이뤄져야지 일개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구상은 좋지만 실제 현실에 비춰볼 때 어려운 점이 많다”고 했다. 또 “한약을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근거 없는 얘기로 오도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술을 공부해서 서로 비교 연구하면 새로운 제3의학이 탄생될 수 있다”면서 “서로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나 만성질환, 난치병 치료에 같이 협력해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중풍환자든, 간경화환자든 모든 치료에 한·양방이 협력하면 치료효과도 빠르고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선생은 “일본의학잡지에 일본의사들의 60%가 소시호탕 엑기스를 사용해 간염치료를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면서 “실제로 많은 일본 의사들은 간장질환에 한약을 써서 치료 효력을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의학에 더욱 애정을 갖고 있는 의료인으로서 무엇보다 후배 한의사들이 어학 공부에 매진해 세계무대에 동양의학을 전파시켰으면 좋겠다면서 나아가 활발한 국제적인 의학교류가 필요하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올해 고희를 맞아 “아내와 함께 7월 중순 경 2주 정도 이태리 여행을 갈 것”이라며 “이태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부터 기대된다”고 말했다. 앞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욕심 내지 않으면서 환자를 돌보고, 사회봉사를 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오세붕 선생은 요즘도 매일 아침 6시부터 40분 간 운동을 하고, 3개월에 한번씩 병원에서 건강체크도 하면서 그동안 모 기업 사보에 연재해왔던 ‘건강칼럼’ 내용을 모아 올 연말쯤 책을 낼 계획이다.

한편 선생은 이번에 회고록을 내면서 “일생에 있어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지만,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새삼 진리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양 =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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