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영의 제주한 이야기](13) 제주에서의 추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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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영의 제주한 이야기](13) 제주에서의 추석상
  • 승인 2023.10.05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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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영

남지영

mjmedi@mjmedi.com


우리집은 내가 중학생일 때까지 명절에 차례를 지냈다. 할아버지가 일찍 작고하신 뒤 제사나 차례를 위한 상차림은 아버지가 장남인 우리집에서 주관하여 준비를 했다. 종갓집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은 제사나 차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제수종류나 비치 위치, 지방 쓰는 법을 늘 상의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기억에 남을 뿐 자세한 규칙이나 격식은 가물가물하다. 게다가 내가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이 되었을 때 어른들이 명절이나 제사 때 맛있는 음식은 하되 제상을 차리지 않기로 결정하신 뒤부터는 더더욱 접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제주에 처음 왔을 때 산더미 같은 음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집안에서는 전을 부치는 데만 계란 3~4판을 썼다. 전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고기산적을 만들기 위해 돼지고기 한 종류만 10Kg 가량 사용한다. 소고기는 돼지고기보다는 양이 좀 적지만 그래도 5Kg 이상을 준비했다.

장남 집안 장녀로서 제수준비는 많이 해 보았기에 음식 만드는 것은 무념무상 몇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며칠에 걸쳐 재료를 구입하고 밑준비를 해야 하는 지휘자가 따로 있기에 나머지 인원들은 그저 무치고 부치고 굽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첫 추석 때 아무리 기다려도 송편 만드는 시간이 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그 시간이 오지 않고 끝나서 정말 어리둥절했다. 육지에서는 추석 전 날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할머니가 주신 쌀가루반죽을 조물조물 만지며 누가 가장 얇게 떡반죽을 펼쳐 달달한 속을 가득 가득 넣을 것인지를 경쟁했다. 아무리 예쁘게 만들어도 송편을 찌면서 터지면 탈락이다. 터지지 않도록 야무지게 갈무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고보니 제주에서는 특별히 떡집을 찾아가지 않으면 일반 가정 행사에서 속을 넣은 떡을 잘 못 본 것 같았다. 육지에서도 집에서 떡을 잘 만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추석 때는 송편이 필수이다. 사다가 먹더라도 추석상에는 꼭 송편이 들어간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추석이라고 해서 송편을 찾는 집은 매우 드물게 보인다. 그렇다고 떡을 아예 올리지 않는 것은 아니고 속을 넣지 않는 떡은 꼭 올린다. 떡 대신 카스테라나 롤케이크는 꼭 상에 내고 떡과 빵을 둘 다 놓기도 한다. 기름떡이라고 해서 쌀가루반죽을 틀로 찍어 튀긴 뒤 도너츠처럼 설탕을 묻힌 것도 자주 보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도 따뜻한 남쪽 지방이므로 쉽게 상할 수 있는 고물떡은 잘 안 놓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런 이유라면 롤케이크는 왜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지 의문이지만, 롤케이크 등장은 얼마 안 되었을 것이므로 조만간 고물떡도 등장하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 해 본다.

그리고 제주에 와서 본 생소한 제례문화 중 하나가 문전제(門前祭)이다. “문전상 촐리라(문전상을 차려라)”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는데 알고보니 제주지역에서는 차례나 제사를 지낼 때 꼭 현관에 상을 하나 더 차린다는 것이다. 집을 지키는 신들(家宅神, 家神)에게 바치는 것으로 일반 제례상이 아늑한 방에 차려지는 것과 달리 문전상은 현관 바로 앞에 놓거나 거실(마루)에서 현관 쪽으로 상을 놓는다. 집을 지키는 가택신들이 그곳에 자주 드나들기 때문이다.

문전상에는 신들이 식사를 하시도록 메(밥), 갱(국)을 놓고 반찬처럼 제물들을 종류별로 1개씩 모아서 놓는다. 가택신은 여럿이 있지만 그 중 부부라고 전해지는 성주신(집터를 지키는 신)과 조왕신(부엌을 관장하는 신)이 메인이다. 이들을 위해 밥과 국을 두 그릇씩 놓는 곳도 있고 사이좋게 나눠 먹으라는 것인지 한 그릇만 놓는 곳도 있다. 어떤 집에서는 굳이 국을 올리지 않기도 한다. 그 집의 가택신들은 국을 안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집안 구성원이 눈치 없이 신들에게 국을 안 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생활방식이 다른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을 겪고 있는 당시에는 당연하게 인지하기가 쉽지 않다. 가택신들이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들보다 더 그렇게 느낄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추석에는 성주신 조왕신이 과연 문전상을 먹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전상에 차려진 음식들은 가택신들 입맛에 맞을는지, 늘 그런 스타일이라면 케케묵었다고 실망할지 역시 고전이라며 기뻐할지, 조금이라도 새롭게 변화된 밥상이라면 신들도 입맛이 바뀌는데 취향저격이라며 좋아할지 “무사 영 차렴시니 (왜 이렇게 차렸니)”라고 할지 궁금하다.

 

남지영 / 경희미르애한의원 대표원장, 대한여한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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