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15) 로드킬, 옆방 원장님, 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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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15) 로드킬, 옆방 원장님, 수라
  • 승인 2023.09.08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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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갯벌 다큐멘터리 <수라>의 한 장면. 쇠제비갈매기가 새끼를 돌보고 있다. 아직 상영중이니, 동물을 좋아하는 어린이들에게 강추한다.

로드킬 신고를 열심히 하는 편이다. 구례로 이사 오기 전, 종종 옆방 원장님 차 얻어타고 다닐 때에도 보는 대로 전화를 하곤 했으니 나름 로드킬 신고의 전문가라고나 할까. 군청이나 시청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면 당직실로 연결되는데 위치를 불러주면 위탁업체가 나와 사체처리를 하는 식이다. 압도적으로 개나 고양이가 많지만, 트럭에 실려가다 떨어져 죽은 닭이나 오리도 흔하고 고라니도 자주 본다. 그 외에 오소리, 너구리, 삵, 두더지, 남생이나 뱀도 도로에서 흔히 보인다. 하도 지리산 권역 여러 군청, 시청에 전화를 하다보니 어떤 지자체가 가장 신속하게 사체를 처리해주는지 통계도 낼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국도나 고속도로의 대략적인 위치를 설명하고 신고한 후 출동 중인 위탁업체 직원과 통화하면서 위치를 특정하는 식이었다면, 최근에는 네비게이션 앱에서 정확한 위치를 불러주어야만 출동하는 것이 트렌드인 듯하니 신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길.

아무튼 이렇게 죽은 동물 신고에는 나름 전문성이 있다고 자부하던 터에, 지난달 폭우내리던 주말 지방도 길가에서 무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청소년 고라니’를 발견하게 되었다. 죽은 동물들은 많이 봤지만 살아있는 동물은 처음 보니, 이걸 신고해야 하는지 그냥 두고 가야하는지 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당황했다. 일단 구례군청에 전화를 걸었는데 당직 공무원도 살아있는 동물 신고는 처음이었던지, 난감하게도 전남도청 번호를 알려줬다. 도청 공무원 역시 구례군 지방도롯가에 있는 고라니를 도청에서 어떻게 하라고 전화를 한 건가 싶은 뜨악한 분위기였다. 성과없는 전화를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만사 귀찮아졌다. 어차피 죽을 고라니 지금 죽으나 조금 이따 죽으나 뭔 상관인가 싶었지만, 이게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냅다 <반달곰 종복원센터>로 전화를 해봤다. 반달곰도 야생동물, 고라니도 야생동물이니 거기는 뭘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놀랍게도 센터에서는 주말에 걸려온, 반달곰도 아닌 흔해빠진 고라니 전화를 귀찮아하지 않고 <국립공원 야생동물의료센터>로 바로 연결해주었다. 더욱 놀랍게도 야생동물의료센터 당직 수의사는 전화를 받고서 바로 출동해서 고라니를 구조했다. 우중충하게 비가 퍼붓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다음날 "어제 데리고 와서 응급처치 열심히 했고, 상태가 매우 좋지는 않아도 아직 살아있습니다. 신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팔로우업 문자까지 보내주었다. 물론 구례에 ‘야생동물의료센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죽은 동물만 신고하다가 살아있는 동물을 구조한 이 경험은 좀 독특했다. 동물들이 문자 그대로 나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달까. 그런 자각 없이도 그렇게 살고 계신 듯했던 분, 출퇴근 카풀을 했었던 옆방 원장님도 기억났다. 그분은 여든이 넘은 외과 전문의였는데, 매번 로드킬 신고를 할 때마다 뭣하러 그런 귀찮은 일을 사서 하냐며 이해가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놓고 정작 동물들이 죽어있는 걸 볼 때마다 혀를 끌끌 차며 안타까워한 것도 본인이셨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산길을 운전할 때, 조금 천천히 달리고 앞에 동물이 보일 때 아주 잠깐만 불을 끄고 기다려주면 되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걸 못하고 짐승들을 친다며 못마땅해하셨다. 그렇다고 그분이 동물을 끔찍하게 아끼시는 분은 아니었다. 오고 가는 차 안에서 수십 년 전 배고팠던 시절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길고양이 가죽을 벗겨 부잣집에 갖다 팔면 돈을 얼마 받았다는 등의 얘기들은 너무나 희한해서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신이 나서 가죽벗기는 공정에 대한 세부 묘사를 하실 때 듣는 입장에서는 고막을 고문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었다. 이처럼 그분이 동물을 대하시는 태도에는 우리 또래와 다른 묘한 지점이 있었다. 그분은 동물권이 뭔지도 모르시는 분이었지만 동물학대범도 아니었고, 애완견을 집 안에서 키우는 걸 절대 이해 못 하시는 분이었지만 집에 찾아오는 길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셨었다. 그래놓곤 자꾸 집에 온다며 귀찮아하시면서도 밥 주던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며 동네방네 자랑하시고, 또 낳았던 새끼 한 마리가 차에 치여 죽었다며 온종일 속상해하기도 하셨다.

생각해보면 그분이 해주신 이야기 속에 동물들이 정말 많이 나왔었는데, 뽀삐나 해피 따위가 아니라 그냥 한 마을에 같이 사는 무명의 성원으로 등장하곤 했다. 예를 들어, 초가집 지붕에 손을 넣었는데 커다란 뱀이 나와 큰일날 뻔했다던가, 고이고이 기르던 닭 잡아먹은 수십년전 괘씸한 족제비를 욕하신다거나, 혹은 기러기를 잡아 어른들한테 돈을 받고 팔았던 흐뭇한 기억을 회상하는 식이다. 말하자면 그분의 세계에서는 사람과 동물들이 함께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동물은 동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같은 시공간에 살며 적당히 서로의 삶을 양해해주고 잡아먹기도 하는 그런 세계 말이다. 동물원에 가야 동물을 보고, 애완견을 구입해서 개와 가족이 되는 그런 세상과는 조금 많이 다른 세상이다.

얼마 전 아이와 새만금 갯벌을 다룬 다큐멘터리 <수라>를 봤다.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아 죽어가는 갯벌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수문을 열어 바닷물이 들어올 때 아이가 와!!! 하는 탄성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는 모습을 봤다. 아마 그 원장님께서도 같이 영화를 봤다면, 갯벌에서 통통한 조개 캐면 돈도 벌고 탕도 끓여 먹을 수 있다며 함께 기뻐하시지 않았을까. 갯벌을 잃어 조개들만 괴로운 게 아니라, 주민들 역시나 생업을 잃고 공공근로로 생계를 유지한다며 울먹거렸으니 말이다. 그걸 보면, 흰발농게나 검은머리갈매기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계에서 인간 역시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는 모양이다. 아이가 카라나 녹색연합의 활동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없지만, 그 할아버지 원장님처럼 같은 세계에 사는 성원으로 짐승들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획 지어진 수용소-동물원-로 가야만 구경할 수 있고, 돈 주고 사야만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런 사이 말고. 적당히 불편하고, 적당히 좋은 점도 있고, 때로는 욕하지만 가끔씩은 마음이 짠해지는 그런 지지고 볶는 사이로 말이다.

 

신유정 / 인류학 박사,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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