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경계 바깥의 말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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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경계 바깥의 말뚝
  • 승인 2023.08.18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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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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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비평┃잡았다, 네가 술래야-경계성 성격장애로부터 내 삶 지키기

 

폴 T. 메이슨‧랜디 크리거 지음, 김명권‧정유리 옮김 ,모멘토 펴냄
폴 T. 메이슨‧랜디 크리거 지음, 김명권‧정유리 옮김,
모멘토 펴냄

의료계열 학생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 있다. ‘의대생 증후군’이라고 불리는데 질환에 대한 설명이나 사례를 공부하다 보면 혹시 내가, 주위 사람이 그 질환의 환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증상이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보다 사람의 ‘정상’ 범위는 대단히 넓구나, 보통은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 증상이 완화된다. 경계성 성격장애도 그런 증상을 유발하는 진단명 중의 하나였다. 이 사람은 왜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다정하다가 어떨 땐 날 무시하지? 소설 속의 불안정한 등장인물에 공감이 가기도 하며, 소위 ‘밀당’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는 문제가 있나? 그러던 시점에서 <잡았다 네가 술래야>라는 책을 처음 접했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분노조절장애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평생유병률이 1~1.5%나 되는, 가장 흔한 성격장애이다. 성격장애라는 진단명을 붙일 정도는 아닌 정도의 사람들도 있고, 일반적인 사람들도 간혹 경계성 성격장애에서 보일 만 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 심각 정도가 부모나 연인에 대한 시위부터 스토킹 범죄나 가스라이팅 사건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이 넓기 때문에, 경계성 성격장애의 사례를 많이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을 읽다 보면 경계성 성격장애 에피소드가 영 낯설고 기이한 남의 일은 아니게 느껴진다.

출간된 지 시간이 상당히 지난 책이고 경계성 성격장애에 대한 다른 책들이 있지만 <잡았다, 네가 술래야>를 한 번씩 다시 읽게 되는 이유는 이 책의 부제목<경계성 성격장애로부터 내 삶 지키기>에 담겨 있다. 심리나 질환에 대한 많은 책은 문제가 있는 본인을 대상으로 하거나 의료인의 관점에서 쓰이기에 진단과 치료를 위한 내용이 주된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본인이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이하 경계인)이든 경계성 성격장애인의 주변인(가족, 연인, 친지 등)이든 경계성 성격장애라는 질환으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데 있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대인관계, 자아상과 정동(정서)이 전반적으로 불안정하며 현저하게 충동적인 특성이 있는 성격장애이다. 경계인이 느끼는 세계는 ‘자신은 광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이고 무섭고 낯선 이들이 자신을 쏘아보는’ 곳이다. 경계인의 증상에서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은 버려지는 데 대한 공포와 불안한 자아상이다. 이들은 악의를 가지거나 자신의 만족감을 위해 주변을 괴롭히지 않는다.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를 강요하게 되고,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주려고 해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경계인의 주변인, 특히 경계인이 ‘떠나지 않기를 원하는’ 주변인은 예측하기 어렵고 만족시킬 수 없는 경계인과의 관계에서 당혹감이나 무력감, 죄책감에 빠지게 될 수 있다. 또 스트레스로 인한 해로운 습관이나 질환의 위험이 커지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기도 한다.

주변인은 자신의 삶을 지켜야 한다. 비행기에서 위기 상황이 닥치면 먼저 본인이 산소마스크를 쓴 후 노약자와 어린이를 도우라는 원칙처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6가지를 기억해서 삶을 되찾으라고 한다. 내가 ‘원인’이 아니라는 것,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 내가 ‘치료’할 수 없다는 것, ‘비난’하지 말고 ‘충돌’하지 말고 ‘자기 삶’을 살라는 것이 그것이다. 경계인이 치료될 수 없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 책에선 경계인도 치료될 수 있으며 더 이상 자해 욕구에 시달리지 않고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며 기쁘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전문적인 치료사의 역할을 주변인이 할 수는 없다. 주변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경계인과 자신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상황의 패턴을 이해하고 예측해 보는 것(좀 더 상황을 통제하기 쉬워진다), 모든 것을 경계인이나 성격장애 탓으로 생각하고 넘기지 않는 것이다. 또 적절한 신체적 정서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자신을 돌보는 것이기도 하고 경계인이 두려워하는 ‘버려짐’을 피해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병의 경계 속에 가라앉았다 던져질 것이 아니라 경계 바깥의 단단한 말뚝이 될 필요가 있다.

김린애 /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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