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14) 농촌에서 가장 귀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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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14) 농촌에서 가장 귀한 선물
  • 승인 2023.07.2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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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지난 6월 남편은 아랫마을 수박 하우스에서 새벽 단기 알바를 했다. 농촌 노인들 하나 둘이 아등바등 농사는 어떻게 지었더라도, 400~500통의 수박을 따고 옮겨 트럭에 싣는 출하 작업은 오롯이 이들의 힘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새벽에 품앗이하듯 이웃 하우스에 삼삼오오 모여 더워지기 전 얼른 수박을 따서 트럭에 잘 실어 공판장으로 보낸다. 남편은 새벽 일찍 일어나 한 두시간 일을 돕고 매번 커다란 수박을 노임으로 받아왔다. 그 덕에 한동안 과일을 사지 않아도 집에 수박이 그득그득해 배가 불렀다. 한번은 나도 따라가 봤는데 진기한 광경을 여럿 보았다. 예를 들어, 내 또래 마을 언니가 양쪽 어깨에 커다란 수박을 한 통씩 얹고 100미터 가까이 되는 하우스를 가로질러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거나, 배구공 토스하듯 트럭 적재함에 수박을 띄워 올려 보낸다거나 하는 놀라운 장면들이다. 모여서 일을 하면 이렇게 보는 재미도 있고 일도 빨리 끝나고, 새참이랍시고 방금 딴 것 중 제일 못생긴 수박을 나눠먹는 것도 꿀맛이고 그렇다. 재미도 재미지만, 너댓명만 모여도 출하작업은 1시간 남짓에 마칠 수 있으니 사람이 꼭 필요하다. 어차피 실어야 하는 수박의 수는 정해져 있는데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작업시간은 길어지고 힘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 해줄 사람. 농촌에서 최고의 가치로 쳐주는 것이 바로 이렇게 일해줄 사람, 또 그 사람이 해주는 일이다. 얼마 전 완결된 농촌 배경의 웹소설 <봄그늘(김차차 作)>에서도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했는데, 주인공의 남자친구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폐가의 무성한 잡초들을 다 베어낸 후 마당을 보여주는 깜짝선물을 했던 것이다(90화). 주인공은 당연히 “작은 아포칼립소가 사라지고 없는” 그 광경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고 남자친구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지만, 독자인 나도 읽으면서 진심으로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농촌에서 풀베기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별로 표도 안 나고, 그렇다고 안 해버리면 너무 무성해져 나간 집 같아 보이니 괜히 심란해지고 마는 그런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노동집약적인 작업인데 했다고 해서 별로 티는 나지 않으니, 오직 해본 사람만 그 고됨과 수고를 아는 그런 일. 그 장면을 읽으며 세상의 어떤 선물도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애정 어린 묘사에 찬탄했다.

그런데 정작 도시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그 얘기를 하다가, 농촌 최고의 낭만, 풀베기 깜짝 선물에 큰 감흥이 없는 친구들을 보며 문득 중요한 차이를 깨달았다. 농촌과 도시에서 말하는 선물의 가치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소설 속 박우경이 여자친구를 위해 낫을 들고 폐가 마당의 무성한 잡초들을 온종일 베었던 일, 혹은 우리 가족에게 항상 다정하게 대하시는 아랫마을 어르신을 위해 남편이 새벽에 하우스에 가 수박을 지고 나르던 일 등을 통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농촌에서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 바로 ‘품’이 가장 귀한 선물이 되는 반면, 도시에서는 좋은 곳에 가서 무언가를 사서 주고받는 것이 귀한 선물이 되는 것이니 그 둘 사이에 깊고도 심오한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조금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있으면 더 좋은 것과 없으면 안 되는 것 중 도시는 전자, 농촌은 후자에 가까워 보인다고도 하겠다. 또 <봄그늘>의 윤차희가 댓돌에 서서 밀려드는 감동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잡초가 사라진 그 마당을 내려 보기만 했던 것처럼, 그 일-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딱히 표는 안 나고 품만 많이 드는-을 해 본 사람들만이 그 선물의 가치를 온전히 아는 것이고 뭐 그렇다.

 

신유정 / 인류학 박사,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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