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여행자가 될 텐가? 승객이 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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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여행자가 될 텐가? 승객이 될 텐가?
  • 승인 2023.06.16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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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히준

박히준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최근 몸이 안 좋아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상이, 생각이, 언제까지나 내 것이 아니며, 언제든 못할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는 소중한 것들임을 뼈저리게 깨닫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끝이 있는 이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끝낼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김지수 지음, 열림원 펴냄

이 말은 살아 있음에 더욱 기억해야 할 말인 듯 합니다. 삶이 유한함을, 그리고 지금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결국 내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대부분 시간 동안 잊고 있거나, 일부러 외면하며 사는 것이 보통 우리네들의 삶의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생각의 끝에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한국 대표적인 지성으로, 85년간 앞서서 시대의 방향성에 제시해주신 우리 시대의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암으로 투병하시고 계셨지만, 맑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항암을 거부하시고 죽음의 목전에서도 저술과 강연으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셨습니다.

저자는 2019년 가을, 이어령 선생과의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라는 기사를 쓰게 된 전후로 인터뷰 전문 기자로서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되며, 죽음은 생명을 끝낼 수는 있지만, 생생한 말은 일상의 곳곳을 파고들어 힘을 발휘 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선생의 통찰을 장기간 인터뷰를 통해 기록으로 남긴 작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죽음은 생명의 끝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시작하는 길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는 아이러니를 경험하였습니다.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고...그게 죽음이야.....(우리는) 죽음을 죽여버렸지. 깨끗이 포장해서 태우고, 추도 미사 드리고, 서둘러 도망쳤어. ‘죽음 앞의 인간’을 쓴 필립 아리에스가 쓴 글에도 나오지만,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팬데믹 앞에서 깨달은 거지.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비로소 지구의 인간들이 생명이 뭐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거야.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구나. ...코로나가 처음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보게. 언제 우리가 마스크 한 장 사려고 그렇게 길게 줄을 서본 적이 있나?”

또한, 이 순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분이라면, 한 템포 쉬어가면서 이 책을 완상해 보길 추천하고 싶습니다.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라네. 말 그대로 거짓이야.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하네......여행자가 될 텐가, 승객이 될 텐가? 그것부터 결정해야 하지. 승객은 프로세스가 생략돼있어. 비행기 타고 한숨 자고 나면 뉴욕이지.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인생 프로세스가 생략돼있어. 비행기 타고 한숨 자고 나면 뉴욕이지.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인생 프로세스를 생략한 사람이야. 목표만 완성하면 끝이지. 돈이 신념이다? 백만장자 되고 나면 어떻게 살 거야? 집 한 채 갖는 게 목표다? 집들이 하고 나면 허무해서 어떻게 살아?”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꺠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꿈이라는 건, 빨리 이루고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걸 지속하는 거야. 꿈 깨면 죽는 거야. 내가 왜 남은 시간을 이렇게 쓰고 있겠나? 죽고 나서도 할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할 말을 잃는 사람 중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라네. 행복한 사람이라네.”

지난 주 본과 4학년 학생 두 명과 대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대화 도중 저를 나타낼 수 있는 세 가지 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더군요. 저를 표현하는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기에, 대신 제가 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말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좋은 선생님’이 되었으면 한다는 것, 둘째는 풀어야 할 주제가 있는 ‘연구자’이고 싶다는 것, 마지막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달리는 사람’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말로 뱉어 놓고 보니 모두 제한된 시간만 허락된 일이더군요.

유한한 삶이기에, 그리고 지금 하는 일들은 모두 끝이 있기에, 승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어 보려 합니다. 무엇이 되어야 한다기보다, 인생의 길 자체를 즐겨 보는 거지요. 주어진 시간 동안 맘껏 힘껏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언젠가 후회 없이 내려놓고 훌훌 떠날 날을 상상해 봅니다. 그 때 저의 끝이 또 다른 사람들의 기분 좋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박히준 / 경희대 한의대 교수, 침구경락융합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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