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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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5·끝)
  • 승인 2004.04.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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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의 귀양일정과 동의보감 완성 □

허준의 나이 70세(1608. 2. 1)에 선조가 서거함에 따라 어의로서 임금의 서거를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허준에게 門外黜送(광해원년 1608. 3. 17) 이라는 귀양명령이 떨어진다.

簡易集(崔립 著) 8권에 나오는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 自 義州”라는 詩를 보면 첫 번째 귀양지가 의주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곧바로 6일 뒤에 다시 中途付處(1608. 3. 23)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 또 한달 뒤에 圍離安置(1608. 4. 24) 라는 세 번째 귀양명령이 떨어지며, 또 일곱 달 뒤에 “허준을 석방하라”는 광해군의 글(1608. 11. 22)을 볼 때, 극성스런 신하들의 등쌀에 마지못해 허준을 귀양보낸 광해군이 허준을 도성과 가까운 거리에 두려는 불안한 마음을 엿볼 수가 있으니 조선왕조실록 광해1년교시에 잘 나타나 있다.

「허준은 호성공신일 뿐 아니라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근래에 내가 마침 병이 많은데 내국(內局)에는 노성한 숙의(宿醫)가 적다. 더구나 귀양살이 한지 한 해가 지났으니 그의 죄를 징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석방하는 것이 가하다.」

이같이 앞 뒤 정황을 살펴볼 때 선조의 명을 받들어 “동의보감”을 집필하고 있던 허준의 입장을 배려하여 마지막 귀양처를 고향인 양천현으로 위리안치해 주었으며, 허준은 조상의 얼이 담긴 정든 공암(허가바위)을 동의보감 집필에 전념할 수 있는 곳으로 선택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귀양이 끝났어도 계속하여 허가바위에서 동의보감을 마무리(1610. 8. 6 광해 2년 완성)하였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허가바위에 와서 동의보감 완성까지의 기간은 약 2년4개월이 되는 셈이다.

<고촌 장곡 거주 허봉 직계후손인 허걸 씨(70여세)의 증언>

「내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는 매년 정월에서 보름 사이에 허가바위로 가서 기도를 드렸어 / 그때는 많은 양천허씨들이 허가바위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어 / 지금은 허가바위가 망가져서 안가 / 그때 허가바위는 바로 한강물가였고 나루터였는데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허가바위 까지는 물이 안들어와 / 허가바위 입구는 좁았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었어 / 그리고 굴속인데도 그렇게 어둡지가 않았어 / 육이오 때도 많은 사람들이 허가바위로 피난했다더군 / 바위안쪽에 제단같이 많은 글씨들이 써 있었어 / 지금은 다 부서지고 이상하게 변했더군.」


□ 상피제도(相避制度) □

조선조에는 중앙집권을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相避制度’가 있었는데 이 제도는 벼슬아치의 출신지역(고향) 등으로는 지방관으로 발령내지 않으며, 또 관찰사 이상은 한곳에 3년 이상을, 그 이하는 5년 이상을 두지 않는다는 제도이다. 다시 말하면 지방 토착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상피제도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신라에서부터 발달되어 내려온 상피제가 성문화된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였다. 고려 상피제는 1092년(선종 9년)에 제정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상피제가 더욱 확대되어 세종 때 성립되었으며, 거의 모든 관직에 적용되었는데 고려 때보다 엄격히 적용되었다<한국브리태니커 11권 597-598쪽. 1994>.

따라서 허겸이 파주목사로 부임 당시에는 허준과 파주와는 전혀 무관하였음을 말해준다. 허준은 아들이 파주목사로 재임시 선조임금으로부터 파주에 60결(18만평)의 땅을 하사 받았을 개연성이 있으며, 허준의 자손들은 서자의 자식들이라는 신분상 껄끄러운 양천현을 떠나 파주에 터를 잡음으로써, 이때부터 파주에 허준의 직계자손들의 마을인 ‘신촌(新村)’이란 양천허씨 마을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 북한 력사과학 제4호(1986. 10. 1)에 기록된 허준의 고향 □

북한의 『력사과학』기록을 보면 “허준은 1540년대에 경기 김포군 양천의 이러한 집안에서 태여났다.

허준이 태어난 집안은 리조 봉건시기 이름있는 의학자들이었던 허공, 허옹, 허종, 허저 등이 나온 의학자 가문이였다. 그들 가운데서 15세기에 활동한 허종은 뛰여난 의학자로서 명성도 높았지만 의생들을 많이 키워 낸 교육가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을 쓴 김창복은 북한의 사회과학원에 근무하는 허준의 직계후손이자 역사학자인 허모씨로부터 전해듣고 본 논문을 작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양천허씨 문중에서는 북한의 허준 직계후손을 접촉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일이 있다.
허준의 후손들은 파주 진동면에 살다가 6.25 이후 북측으로 편입되었다. <참조 : 북한 『력사과학』 4, 1986.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서울대학교 金浩 논문 58쪽>


□ 글을 마무리하며 □

필자는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 연구한 자료를 토대로 허준의 고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허준은 서울 강서구 등촌2동 능안마을<당시 경기도 김포군 양천현 파릉리(능곡동)>에서 하녀의 신분이었던 여인에게서 태어났으나, 아버지 허론의 본부인이 살고 있는 같은 집에서 함께 살기가 곤란하여,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강서구 가양2동 탑산(구암) 아래<당시 공암리>로 거주지를 옮겨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나머지 동의보감 집필지와 사망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고 자료제출만으로 끝내고자 한다.

그러나 다시한번 반복하거니와 학문과는 거리가 먼 일반행정직 공무원인 필자가 이고장의 향토사를 찾아 정리하던 중에 지득하게 된 허준의 자료를 공개하는 취지일 뿐이며, 언제라도 필자의 견해를 수정할만한 관련 자료가 나온다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그리고 본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일 뿐이므로 혹시 토론이 필요하거나 근거자료를 요구하실 분이 있다면 필자에게 요구하시기 바란다.

전국의 한의사님과 한의학 교수님들 그리고 한의학 관련업에 종사하시는 모든 분들은 우리나라 한의학 발전에 분명히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허준기념관 건립을 성원하시어 전 세계에 한의학의 종주국이 대한민국임을 알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본 글을 마무리하면서 무엇보다도 반평생을 허준 선생의 연구에 바쳐온 한대희 박사님, 허준기념사업을 발기·추진하셨던 문종화 회장님, 백제사 연구에 모든 것을 투자하신 한종섭선생님, 그리고 김호박사님과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양재·강훈덕·김연갑·손홍렬·이도학 교수님, 이호태님, 양천허씨대종회 그리고 서울 강서구한의사회 김영권 회장님께 감사드린다.

손 주 영
공무원(서울 강서구청)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son138@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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