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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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4)
  • 승인 2004.04.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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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龜岩’과 ‘陽平君’은 허준 고향의 특정지명 □

일반적으로 號는 자신이 지어서 부르는 自號와 집안의 어른이나 스승 또는 친구들이 지어서 부르게 되는 雅號가 있는데, 작명대상자의 성장지와 특별하게 인연이 있는 지명이나 산천초목, 자연물 등의 글자를 취하여 작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양천허씨세보에 ‘탑산(구암)’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은 ‘탑산’의 별칭이 ‘구암’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허준의 친필 병풍과 서간문에는 ‘陽川許浚’이라는 낙관휘호가 보이며, 아호가 龜岩이라고 했음을 볼 때, 허준은 자신의 고향과 자란 곳을 암시하고 있으니, 오늘날 서울 강서구 가양2동 탑산 근방임을 짐작할 수 있다. (탑산은 양천허씨 발상지인 허가바위가 있는 한강변의 동산인데, 탑산아래는 한강을 건너는 공암나루터이며 또 허가바위에서 허준이 동의보감을 마무리하였고 돌아가셨다는 곳으로 현재 구암공원이 되었다.)

허준의 작호가 陽平君이고 그의 외아들인 허겸(許謙)도 파릉군(巴陵君)이라 한 것은 이곳 양천현의 또다른 별칭이 양평, 파릉, 공암, 제양, 양원 등 여러 지명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허준은 자신이 자라고 정들었던 구암(龜岩 : 현재 탑산)이란 지명을 호로 택하였으며 ‘양평군’으로 습봉하였고, 아들 역시 고향의 지명을 따서 ‘파릉군’으로 습봉된 것이다.

이처럼 허준이 족보상으로는 양천현 파릉리 능곡동(강서구 등촌2동)으로 되어있고, 아호가 구암인 것은, 본부인이 살고있는 능곡동에서 함께 살기가 곤란하여 허준의 친모와 아들 허준은 탑산(구암) 근방으로 나와 따로 살았기에 허준이 어릴 적 정든 추억이 담긴 ‘구암’을 자신의 호로 自號한 것으로 생각된다.


□ ‘탑산’이 ‘구암(龜岩 : 거북바위)’이다 □

고대인들은 동서남북 사방의 성좌(星座)가 우주를 다스리는 제왕이라 생각했고, 그 밑에 사방을 수호하는 신수(神獸), 즉 동방에는 청룡, 서방에는 백호, 남방에는 주작, 북방에는 현무의 방위신(方位神)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옛날부터 왕들이 왕도(王都)를 정하는데 기본적인 요건으로 삼아왔던 것이 바로 사신도(四神圖)이다.

또한 무덤에만 사신도를 그려 넣은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풍수지리와 음향오행을 접목하여 생활 곳곳에 사신도 사상을 적용하였음이 실증으로 밝혀지고 있다.

최근 하남시 문화재 전문위원이었으며 백제사 학자인 한종섭 씨가 한성백제 500년 왕도에서 왕궁을 중심으로 남쪽에 폭 26m, 높이 55m의 인위적으로 봉황(주작)을 조성한 바위를 발견하였으며, 북쪽 한강변에는 구산(龜山)이라는 지명의 백제시대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찾아냈다. 또한 후백제 왕도인 전주의 도성 북쪽 전주천 언덕위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길이 18m의 거북바위 (玄武)와 남쪽에서 봉황암(주작)이라는 바위를 찾아내기도 했다.

거북바위는 풍수지리설에서 북쪽을 방위하며 수기(水氣)를 맡은 태음신(太陰神)으로, 강변의 수호자로서 방어개념의 상징적 역할(武)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방위신인 사신(四神)은 또 사방의 수호신으로서 군사적으로 부대의 깃발, 포진에 응용되었고, 성터의 입구나 군사적인 시설에도 거북의 모양을 형상화하여(거북선 등) 이용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이 고장 최초의 지명이 ‘제차파의(齊次巴衣 : 제사드리는 바위)’로 기록된 이래, 신라 경덕왕 때 한문식 표기로 ‘공암(孔巖 : 구멍바위)’으로 바뀌었으며 신성한 제사장소인 허가바위를 보호하며 아울러 북방의 한강변을 지키는 의미를 부여하여, 또 하나의 별칭으로 孔巖을 ‘구암(龜岩 : 거북바위)’이라 지칭하였고, 산위에는 ‘진산사’라는 사찰을 건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후 사찰은 없어지고 탑만 외로이 남아있어 ‘탑산’이란 이름이 생겼으며 오늘날 공식 지명이 된 것이다. 한강 서부지역에서 고대사회의 제일가는 성소(聖所)가 이곳 탑산이며, 탑산이 바로 ‘거북바위(龜岩)’였던 것이다. 따라서 ‘龜岩’이라는 허준의 號에서 그가 어린시절을 구암(탑산)아래에서 자랐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제문화연구회 대표 한종섭 씨 논문 및 부여 문화재대학교 이도학 박사 논문 참조>


□ 파릉산집(巴陵散集) □

구암학보(1993년 12월호)에 강훈덕교수(전 성심여대 민속학 교수)가 쓴 “許浚史蹟址 孔巖에 대한 考察”이란 제호의 글에는 파릉산집에 있는 「許浚 在於孔庵 下漏屋 是洞作著 浚卒爲庵」(허준이 누수(빗물)가 뚝뚝 흐르는 동굴암자에서 책을 저술하였으며 또 암자에서 돌아가셨다)이라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파릉산집의 저자는 산허거사(山墟居士)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 글이 발표된 뒤 공교롭게도 MBC 드라마 “허준”이 방영되면서 또 기록내용의 근거인 ‘파릉산집’의 진위여부가 세인들의 시빗거리로 부상하였고, 이미 허준기념관 사업을 추진중인 강서구청도 시비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에따라 필자는 이호태 씨와 함께 이미 대학을 그만두고 사업가가 된 강훈덕 교수를 어렵게 찾아 만나뵀으나 “파릉산집”의 내용과 저자인 산허거사가 누구인지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당시 강교수가 들려주는 파릉산집 내용과 필자 일행이 파릉산집을 추적했던 과정을 적어본다.

강교수가 고서를 많이 소장한 이씨라는 사람을 소개받아 아리랑 연구가이자 민속박물관장인 김연갑 교수와 함께 강남 어느 아파트 자택을 방문하여 환담 중,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고서 속에서 작은 책 하나를 우연히 펼쳐본 결과 허준에 대한 상기 내용과 또 다른사람의 이야기도 나오는 것을 보고, 주인의 양해를 구하여 빌려 가지고 와서 허준을 기록한 부분을 복사하고 원본은 주인에게 돌려드렸으며, 복사된 것을 가지고 글을 써서 구암학보에 게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부분이 먼 훗날 시빗거리가 됨에 따라 그 책 소장자를 추적했으나 이미 돌아가셨고 많은 고서들은 돌아가시기 직전 약값 조달을 위해 여기저기 팔았으며 마지막엔 모두 강릉박물관에 팔아버렸다고 한다.

또 당시 책을 복사했던 복사지는 10여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듣고 우리는 강릉박물관까지 방문하여 그 사실을 확인한 바, 당시 이씨에게 1억4천만원을 주고 한 트럭분의 古書를 사서 싣고 왔으나 아직까지 대부분 수장고에 있고 미확인 상태라고 하여, 나중에 파릉산집이 발견되면 연락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왔다.

그리고 또 강교수에게 확인한 바, 당시 파릉산집의 상태를 설명하며 허준 외에도 시대가 다른 영조때 인물도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는 대답을 들음으로써, 혹시 양천현(파릉)과 관계가 있거나 호가 ‘파릉’인 사람이 책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파릉(巴陵)을 아호로 한 인물들을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한 결과 모두 세사람이 나왔는데 허준의 아들인 허겸과 이상의(선조때 호성공신, 양천허씨 허휘의 외손자로 양천에서 자람) 그리고 이경(영조 22년)이었다. 따라서 파릉산집이 존재한다면 영조때 사람인 이경(李璥)이 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계속>

손 주 영
공무원(서울 강서구청)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son138@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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