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3)
상태바
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3)
  • 승인 2004.04.19 16: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 경기도 파주와 양천허씨의 관계 □

어떤 학자가 ‘허준의 고향은 파주이다’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아직까지도 논란이 있다. 필자는 어떤 논리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보편적 상식에 기초되어야 하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나중에 그 논리를 수정 또는 부정할만한 자료가 나온다면, 논리를 주장한 자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주장에 수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가 ‘허준의 고향은 양천현(강서구)으로 본다’라고 주장하는 논리전개는 현재까지의 자료에 근거한 것이며, 뒷날 새로운 자료에 의해 수정 또는 부정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파주는 양천허씨 문중과 고려 때부터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허준을 파주사람으로 볼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규장각에는 坡州牧邑誌(道光21년 <1841년 : 헌종7년>)와 坡州郡邑誌가 있어 살펴 본 바 파주군읍지에는 인물, 총묘 등 기록이 전혀 없어 참고자료가 못되며, 파주목읍지 성씨조에도 양천허씨 관련인물은 기록이 없으나 총묘 기록에는 양천허씨 관련 인물들이 많이 보였다.

1) 파주목읍지 총묘편에 기록되어 있는 양천현 관련 인물로 ‘허공, 김안국, 김정국, 허종, 허침, 허광, 허욱, 엄집, 허굉’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양천현(강서구)사람들이며 묘소를 파주에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물들은 모두 양천군읍지에 나오는 인물들이며, 특히 임진왜란 때 의병장 허욱은 양천현 월촌리가 고향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살다가 타계한 후 월촌리에 묘소를 썼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파주 총묘편에 나오는 것은 나중에 파주로 이장한 것의 객관적 증거가 된다.
허욱의 호를 따서 세운 ‘정목초등학교’가 지금 월촌리(지금의 목2동)에 있으며 후손들의 종중회관도 있다.
엄집은 능곡동 허씨네 동네에서 허씨들과 함께 수백 년을 살아온 씨족으로 지금도 그 후손들이 등촌동(능곡동)에 살고 있다.

2) 최근에 제작된 파주군지 성씨조에 나오는 허씨중에서 양천허씨로는 허로, 허종, 허침, 허준, 허형손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허형손’의 묘는 원래 양천현 월촌리에 있었으나 파주로 이장한 것이며, 나머지 인물들은 거의 허준의 집안들이다.


□ 파주는 주로 ‘陰宅地’로 활용되었다 □

경기도 장단 또는 파주 땅은 한양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지세가 좋아서인지 과거 타 지역 양반들의 묘소를 많이 볼 수가 있다. 조선조 600년을 이끌었던 훌륭한 역사인물들의 묘소들이 많이 있으며, 양천현에 묻혀 있던 묘소들도 제반 사정으로 장단이나 파주, 용인 등으로 이장한 예가 많았다(例 : 허욱, 허형손, 엄집 등).

반대로 과천사람이던 ‘심정’ 의 묘소가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것처럼 묘소가 있다고 해서 그곳이 곧 고향이라고 단정하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양천현(해동지도)<채색필사본 1760년대, 규장각 소장> 지도를 보면 양천현 지도 그림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기록 되어 있다. 「自漢江流下 一고通長湍臨津江 一고通江華甲串津 一고通黃海道海路(자한강유하 일고통장단임진강 일고통강화갑곶진 일고통황해도해로)」 ‘한강물의 한줄기는 장단 임진강으로 흐르고, 한줄기는 강화 갑곶나루로 흐르고, 한줄기는 황해도 바다로 흘러간다’ 라는 글귀이다.

강서구 구암공원에 있는 공암나루에서 배를 띄워 한강 북쪽 물살을 타면 저절로 흘러가 20~30분 후에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祖江)이 나온다. 조강에서 임진강 쪽으로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가다보면 장단면을 끼고 한줄기는 판문점 쪽으로 또 한줄기는 진동면 쪽으로 갈라져 흐르게 된다.

그 당시 물가에 사는 이들의 장례 풍습중 하나는 시신을 배에 띄워 목적지까지 배로 운반하는 것이다. 즉 강물은 오늘날 교통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천현의 많은 인물들의 묘소가 파주에 있는 이유가 한강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光海君日記에 의하면 허준은 보국숭록대부이므로 3개월 동안 大夫의 예를 갖춰 11월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니, 1615년(광해군 7년) 8월 17일 허준이 서거한 이후 11월에 가서야 허준의 외아들인 許謙이 坡州牧使로 재임중이었으므로, 가양동(공암)에서 한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주 진동면 하포리에 부친을 장사하였으리라 판단된다. (‘허준은 살아있다’ 구암학회장 한대희 편저 참조)


□ ‘허겸’은 양천현을 떠나 파주에 새로 허씨마을을 세웠을 것이다 □

아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나라에서는 허준을 대부로 숭상한다 할지라도 고향에서는 여전히 서자 집안으로 기를 펴지 못할 것이기에 허준의 후손들은 양천현을 떠나 파주에서 뿌리를 내렸으리라 짐작되며, 조부(허론)와 증조부(허곤)의 묘소 역시 파주로 이장했으리라는 추리도 가능하다.

이에 근거하여 허준의 출생지가 파주라는 설이 나오게 되나, 아들이 당시 파주목사였다는 사실은 상피제도(相避制度)가 엄격하게 적용되던 시절이므로 허준이나 그 아들인 허겸의 고향이 파주가 아니라는 설이 입증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선조임금이 허준에게 하사한 양평군(楊平君)이라는 부원군(府院君)의 칭호는 고향 “양평(강서구)”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도 대개 고향의 지명을 아호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도 아호나 군호로 대부분 고향 지명을 사용하였으므로, 양평군이라는 부원군 칭호 역시 고향인 양평(陽平 : 강서구)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제차파의(齊次巴衣), 공암(孔巖), 제양(齊陽), 파릉(巴陵), 양평(陽平), 양천(陽川) 등의 지명은 오늘날 “허가바위”가 있는 강서구의 옛 지명들이다.


□ 선조임금이 허준에게 하사한 18만평의 賜牌地는 어디일까? □

선조37년(1604. 10. 29) “호성공신 교서를 발급할 때 선독한 별교서”를 보면 「-- 허준, -- 은 3등 공신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4인, 노비7구, 구사2명, 전지60결, 은자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김응남”은 2등공신에 책훈됨)

여기서 선조임금께 하사받은 “전지60결(1결은 약 3천평, 60결은 약 18만평)”이란 사패지가 어디인지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허준과 허준 자손들의 자급이 아무리 높다 할지라도 고향인 양천현에서는 서자 신분으로 하인 13인을 거느리며 임금께 하사받은 넓은 땅을 경작하며 기를 펴고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 사패지 18만평을 양천현에서 받지 않았다면 그다음 사패지로 받을 수 있는 후보지는 어디가 될까? 그것은 당시 아들 許謙이 목사로 있던 파주땅에 사패지를 받았을 확률이 제일 높다고 생각된다. <계속>

손 주 영
공무원(서울 강서구청)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son138@empa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