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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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岩 許浚의 고향은 어디일까?(1)
  • 승인 2004.04.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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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6일 대한한의사협회 회관 및 한의학연구소 기공식이 서울 강서구 가양동 부지에서 있었다. 이 곳은 구암 허준 선생의 유적이 보존된 곳이지만, 그동안 구암의 출생지를 둘러싸고 이견들이 분분했다.
다음은 1991년부터 서울 강서구 향토사 정리업무를 담당하면서, 허가바위의 서울시 지방문화재 지정 및 구암축제 기획의 실무를 담당해온 손주영(56·서울 강서구청 민원행정지원팀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씨가 허준의 출생지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 본지에 기고한 것으로 본지가 재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 ‘허준’ 자료를 게재하면서 □

국어사전에서 ‘고향’이란 단어를 보니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 또는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어 살던 곳’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온 나라가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오늘날에는 ‘고향’의 의미가 별로 일 것이나, 한양 천리길이 한달 걸리던 옛날에는 ‘고향’이란 단어 속에 어머니의 품속 같은 포근함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으로서의 조건에는 ‘애틋한 情’이 전제되어야 하며, 설사 자신이 태어났거나 또는 잠시 살았던 곳이라고 하여 무조건 ‘고향’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친정에 가서 아이를 출산하고 일정 기간 그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외가를 고향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은 460여년전의 허준 선생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따져 본다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1개 주만도 못한 크기의 한반도가 모두 허준 선생의 고향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허준 선생의 고향 운운할 이유가 무엇인가?

1995년 중국 국가주석이었던 장쩌민이 우리나라 국회에 와서 한국이 중국에 은혜를 베푼 것 중 하나가 동의보감을 전해 준 것이라고 했듯이, 한의학과 중의학의 구심점이랄 수 있는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 선생에 대한 자료는 참으로 소중하며, 무엇보다도 “허준기념관”과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이 서울 강서구의 “구암공원”내에 들어서게 되는 시점에서, 이곳이 허준 선생의 고향이며 동의보감을 마무리한 곳임을 유추할 만한 자료를 많은 이들에게 알려드리고, 이곳을 우리 한의학 발전을 위한 교두보로 자리매김 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쓴다.

그러나 필자는 서울 강서구청 행정직공무원 신분에 불과한 자로 감히 여러 한의사, 교수, 박사님들이 보시는 ‘민족의학신문’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필자가 10 수년 동안 강서구 향토사를 연구하던 중에 지득하게 된 허준 선생에 대한 자료는 최소한 한의계에는 공개해야 한다는 의무감 속에 이 글을 쓰게 되는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아울러 애정어린 질정과 가르침에 겸허히 따르고자 한다.

□ 양천현(강서구)의 허가바위(孔岩)는 양천허씨의 발상지 □

양천허씨세고(辛亥譜) 서문에 보면 ‘양천 허씨는 가락에서 나왔으며,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김수로왕의 30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선문은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일조를 함으로써 공암현 일대를 다스리는 촌주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공암현이 양천현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양천허씨”가 되었고,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수많은 훌륭한 인물을 배출한 명망 있는 씨족을 일으켰다.

강서구 가양2동의 구암공원 옆 탑산 아래에 있는 “허가바위”는 고려 개국공신이며 양천허씨 시조인 허선문이 허가바위 동굴에서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양천 허씨 문중에서는 오랜 세월 해마다 정월보름에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며 신성시 하는 곳이다.

실제로 孔岩(탑산 일대의 옛 지명)의 남향에 제일제당이 세워질 67년 당시 터파기 공사 도중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허선문’이라고 음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는 기와 토기들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수거해 갔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이 일대가 최초로 양천 허씨들이 자리잡았으며 일대를 다스리던 토호세력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이렇듯 현 구암공원이 들어서 있는 탑산 일대에 양천 허씨들이 최초로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어느 시점에서 양천허씨 중심세력은 陵谷(강서구 등촌2동)과 月村里(목2동) 등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 이유와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연산군 11년 7월의 기록을 살펴보면 파주, 고양, 양천, 통진, 김포 등에 이르는 한강변 주민 500여호를 내보내고 연산군의 사냥과 놀이터로 한강일대를 “금표구역”으로 설정한 일이 있었는데, 한강일대에 생활 근거가 있는 양천허씨들은 멀리 이전할 수는 없고, 걸어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는 가까운 능곡과 월촌리 등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말썽 많던 금표구역은 이듬해 5월에 해제됨)

□ 양천현에는 조선조 말까지 양천허씨들이 가장 많이 거주 □

陽川郡邑誌(광무3년, 박준우 : 규장각 소장)에 기록된 옛 양천현의 인물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허씨들이고, 그중 상당수가 영월공파·봉사공파·대제학공파·이천공파·세마공파·판도좌랑공파 등이다.

그 중 허준을 둘러 싼 주변인물들 중 허씨 몇몇만을 살펴보면, 18세손인 허종(許琮), 허침(許琛), 허굉(許굉), 20세손인 허엽(許엽), 그 자손인 허성(許筬), 허봉(許봉)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강릉에서 출생한 許筠(홍길동전 저자)과 그 누이 許蘭雪軒의 기록도 보인다.

그리고 허준의 큰 조부인 허숙(許琡)의 집안은 대대로 양천현 능곡동 백석마을에 묘를 썼으며, 1980년에 묘터에 학교가 들어섬에 따라 용인으로 이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양천 허씨 세마공파 족보에서 확인하였다. <계속>

필자 연락처 : son138@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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