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과 귀납, 그리고 한의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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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역과 귀납, 그리고 한의학(2)
  • 승인 2004.04.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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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진(창원 한국한의원)

Ⅳ. 연역적 원리의 이제마 사상의학

한의학이란 학문은 거개가 연역의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아 무리가 없는데 한의학 이론은 대개 음양오행론이나 오운육기론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조직해부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해서 종합하는 서양의학은 귀납의 학문이다. 이와같이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도 연역과 귀납으로 서로 대대적인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범주를 설정하고 그 범주에 개개의 사물을 맞춰나가는 방법은 한의학의 방법
이고 개개의 사물을 하나 하나 연구한 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방법은 서양의학의 방법이다. 한의학 가운데서도 사상의학이야말로 가장 많이 연역의 방법에 의거해서 연구 분석해 나가야 하는 학문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60억의 인구를 네 가지 범주로 딱 갈라놓고 네 가지 범주의 어느 범주에 속하는 유형인지 판정하는 것이 바로 사상의학이다. 60억의 인구가 60억 가지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을 터이지만 사상의학은 단지 네 가지만을 인정하는 틀을 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60억의 다양성을 넷으로 압축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넷 이외의 상황은 원리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60억이 됐던, 이 60억이 불어서 120억이 됐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태양인이 아니면 소양인 또는 태음인 또는 소음인이라는 것이 바로 이제마가 제시한 사상의학이라는 것이다.

60억 또는 120억, 아니면 그 이상의 다양한 숫자의 인간을 언제나 네 가지 사상인 중에서 단 한 가지 사상인에 배속시킬 수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이유가 사상의학이 기저에 깔아 놓은 관념적 추상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우주만물을 태극, 음양, 사상이라는 관념의 틀로 규정 지울 때 이미 사상의학은 하나의 원리적 틀로서 완성되어버리는 것이다.

Ⅴ. 체질 이론과 귀납적 원리

60억은 60억 가지의 현실 영역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 다양성은 60억 가지 이상이다. 60억 가지에서 표본을 추출하여 거기에서 드러나는 특징적 요소를 묶어 내어 각기 범주를 특성화하여 분류하면 다양한 특질을 가진 몇 가지 범주를 귀납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

이렇게 도출된 범주를 어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우리가 현재 별다른 정의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체질’이라는 용어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체질이란 말이 들어간 많은 용례 중에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으로 생각되는 ‘알레르기 체질’이라는 용어를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즉, 알레르기 체질이란 관념을 먼저 가정한 후 현실에 연역해 본 경우가 아니라 현실의 어떠한 사례들을 묶어보니 알레르기 체질이라 할 만한 어떤 범주가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체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체질이란 용어에 내포된 개념 속에는 반드시 귀납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귀납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범주는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묶을 수 있는 체질의 종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허약 체질이란 말도 가능하고 비만 체질이란 말도 가능하다. E. 크레치머(1888∼1964)는 세장형 체질, 비만형 체질, 투사형 체질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밖에 흉선 림프 체질, 삼출형 체질, 관절 체질, 신경관절 체질, 결합조직 체질 등등 다양한 체질의 분류가 시도되었다.

한의사들이 체질이란 용어가 한의학의 용어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체질이란 용어는 결코 한의학 용어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 대개의 한의학 용어는 음양의 대대적인 개념으로 표현된다.

음양이란 용어의 경우, 자체가 이미 음양을 말하고 있고, 장부라는 용어를 예로 생각하더라도 장과 부는 서로 음과 양의 대대적인 개념이다. 기혈, 정신, 혼백, 영위 등의 용어 뿐 아니라 많은 한의학의 전문 술어들은 대대적인 음양이론에 근거하여 황제내경에서 출발하는 장상론이나 경락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령 적취[積聚]를 예로 들더라도 적은 유형이고 취는 무형이다. 체질[體質]에
서 체[體]는 신체[身體]의 체고 질[質]은 기질[氣質]의 질이다. 여기서 다시 기질이란 말은 바탕이란 말이고 이때 기는 기상[氣象]으로서 무형이고 질은 질료[質料]로서 유형이다. 또한 신체에서 신은 심신[心身]의 신이고 체는 육체[肉體]의 체이므로 신은 기능적 무형의 몸이고 체는 고깃덩이로 된 유형의 몸이다.
그러나 이렇게 놓고 보면, 체질이란 용어는 유형의 체와 유형의 질로 구성된 인체를 가리키는 개념이 되므로 심신을 하나로 다루는 한의학의 이론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개념이 불완전한 용어는 한의학에서 정의되고 사용되어 오던 보편적인 용어라 볼 수 없으며 외부에서 사용되던 용어가 한의학으로 유입되어 사용된 것이라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신체의 기질’이란 개념을 축약하면 체질이란 용어 외에도 신기, 체기, 신질과 같은 용어도 가능하다. 체질이란 용어가 한의학 술어로 사용되려면, 그에 대응하는 무형을 가리키는 신기 같은 정도의 용어가 한의학의 보편 술어로 사용되고 있어야 마땅하다. 가령 열격이 있으면 반위라는 개념이 있는 것이고 위기가 있으면 영혈이란 용어가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기[身氣]라는 말이 한의학에 없으므로 체질[體質]이란 말이 한의학 용어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체질이란 용어는 황제내경의 어느 구절에도 없으며 동의수세보원에도 나오지 않는다. 체질이란 말의 그림자만이라도 굳이 찾아보겠다면 조헌영(1900∼?)의 『통속한의학원론(1934)』에서 ‘병자 개개의 특질’이라고 언급한 부분을 들먹일 수는 있다. 그러나 조헌영의 책은 사상의학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즉, 그때만 하더라도 사상의학에 체질이란 개념을 덮어씌우기 이전의 시대임을 시사한다. 그 시대에 사용해오던 체질이란 말의 보편적 개념이 이처럼 단순히 ‘신체의 특별한 기질’이란 의미를 가진 말이었을 뿐 요즘 유행하는 체질이란 용어가 갖는 개념은 없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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