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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871> - 『硯農藥方文』
벼루에 먹을 갈아, 鄕村士人의 養生方
2019년 06월 08일 () 06:00:11 안상우 mjmedi@mjmedi.com

이 책은 서명이 확실치 않은 조선 후기 무명인사의 필사 처방집으로 좌우 한 뼘 너비가 채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수진본 의서에 속한다. 작성 시기나 작성자명이 밝혀져 있지 않고 미처 서제도 기재하지 않은 채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단지 집안 식구들을 보살필 요량으로 많이 쓰이는 약방문들을 한군데 모아서 작성한 家藏 方書로 보인다.

   
◇『연농악방문』

다만 본문 첫 면에 양각으로 새긴 소형 朱印이 찍혀져 있는데, ‘硯農’이라는 아호가 각자되어 있다. 그런데 2과의 인장이 겹쳐져 찍혀 있는 점과 표지가 개장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소장자가 바뀌었거나 후인이 보존을 위해 새로운 표지를 덧붙여 장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 인장을 근거로 저명한 서지학자인 南涯 安春根(1926~1993) 선생이 배접지 이면에 전적 정리를 위해 ‘硯農藥方文’ 이란 제호를 임시로 달아놓았던 것이 보인다. 후인이 남애 선생의 필치를 재대로 판독하지 못한 채, 부전지나 표지면에 ‘硯農藥方冗’, ‘硯農藥方穴’ 같은 어이없는 서명을 옮겨 적어 놓았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는 오류일 뿐이다. 책에 나타난 정보만으로는 더 이상 적합한 서명을 부여할 길이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남애 선생의 의견을 좇아 장서인에 표기된 호명을 붙여 ‘연농약방문’이란 서명을 따르기로 한다.

남애 안춘근은 강원도 태생의 서지학자이자 출판학자로 자신이 수집한 장서 1만 여권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기증하였고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서지학과 출판학을 강의하는 한편, 고서동우회를 창설하여 우리나라 고전적을 발굴하고 학술가치를 조명하는데 일생을 바쳤으며, 국제출판학술대회를 유치하여 학술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현재 이 책에는 서발이나 목차는 남아 있지 않으며, 기재된 처방들 사이에 특별히 병증별로 정렬하거나 주제별로 분류해 놓지도 않았다. 계선이나 판심도 구분하지 않았고 다만 지면을 상하 2단으로 구분하여 1면에 대략 2종의 방제를 기재하였는데, 방명을 1칸 대두시키고 굵은 글씨로 써서 눈에 띄게 고안하였고 우측에서 좌측으로 가면서 종서로 기록하였다. 또 중량이 많은 약종으로부터 차례로 배열하되, 약재별로 일일이 기재하지 않고 ‘各’자를 넣어 동일한 중량의 약재를 모아 기재하는 방식은 한국방서에서 독특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이러한 화제식 기재방식은 실제로 조제실에서 첩약을 作貼할 때, 분량을 혼동하지 않고 투입한 약재를 일일이 점검하여 확인하기에 편리한 이점이 있다. 게다가 처방 아래 적응증과 복약법, 특기사항을 별도로 기재해 넣거나 탕전시 添入해야 하는 생강, 대추, 파뿌리 등 보조재나 갱엿, 찹쌀 같이 전탕 중에 넣어야만 하는 부가재를 한눈에 가려보기 좋다. 대략 이러한 화제작성 방식은『방약합편』이 널리 유포되면서 대중적으로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훨씬 오래 전부터 한국적인 의약문화만이 지닌 독특한 방식으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 등장하는 방제로는 십전대보탕, 인삼양위탕, 청서육화탕, 곽향정기산, 불환금정기산, 향사평위산, 향소산으로부터 시작하여 평진탕, 향유산, 불수산, 궁귀탕, 실소산, 생맥산, 삼백탕 등 다양한 용도의 방제들이 상호관련성 없이 이어져 있다. 아마도 작성자는 자신이 자주 사용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방제들을 무작위로 선별하여 기재했던 것이라고 여겨지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곽향평위산이나 복령호박산, 대정기산, 궁귀보중탕 같은 합방법이나 변방들이 다수 수록된 것으로 보아, 역시 이와 같은 견해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골에 묻혀 살면서 농부가 밭을 가는 심정으로 먹을 갈아 글을 썼을 어느 이름 모를 士人이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애용하였던 약방문들을 한데 모아 작성해 두었던 주머니 속의 修身訣이자, 養生方이었을 것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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