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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과 한의계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도전과 노력
배원식 선생을 회고하다(1)
2019년 03월 22일 () 06:00:56 이종안 mjmedi@mjmedi.com
   
 

올해는 한의학 임상연구의 초석을 마련하고 한의학의 국제화를 실천, 근현대 한의학의 대명사로 칭송받는 際光 배원식 선생의 13주기를 맞는 해다. 배원식 선생의 수제자로 배원식한의원 2대 원장으로 재직 중인 이종안 원장의 연재를 통해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의사제도의 정착과 대한한의사협회 설립, ‘의림’지 발행 등 한의학의 임상연구 활동,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한 각종 활동 등 듣고 지켜본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 본다 (편집자 주)

 

얼마 전 대한한의사협회는 3.1절을 맞아 한의사와 한의학이 일제의 잔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이뤄내 국민건강증진에 기여하는 의료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을 밝힌 바 있다.

일제의 본격적인 압제가 시작되기 전인 1900년 대한제국 의정부 총무국 관보과에서 발행한 관보(제1473호, 내부령 제27호)에 공포된 ‘의사규칙’에 당시 의사는 전통의학을 수행하는 한의사를 위주로 해 서양의학의 지식과 신기술을 습득한 의료인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일제 강점기 전개된 한의학 말살 정책으로 한의사가 의생으로 격하됐고 아직껏 그 위상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의사와 한의학의 위상 회복을 위한 노력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인 1945년 해방 정국에서부터 수많은 선배 한의사들에 의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는 막연한 추측이 아닌, 한의학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물론 아직까지도 한의사와 한의학의 위상이 올바르게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한의사협회가 현재의 거대 의료단체로 거듭나고 위상을 정립하기까지 많은 한의계 원로들의 수 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8.15 해방...한의학과 한의계의 진정한 해방은 여전한 숙제

1945년 8월 15일 맞게 된 해방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36년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되찾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한의학과 한의계의 입장에서도 글자 그대로 빛을 찾는 ‘광복’ 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으로 인해 호칭이 의생으로 격하되고 그 숫자 또한 1914년 말 5,827명에서 해방 직전인 1943년에는 3,337명으로 30년 사이에 40% 이상 감소하는 등 해방 이후 한의계는 말 그대로 빈사 상태에 처해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많은 한의계 인사들은 조국 광복과 함께 한의학과 한의계도 진정한 해방을 맞기를 염원했으며 일제의 의해 쇠락의 길을 걸어왔던 한의학이 다시 민족의학으로 되살아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한의계의 염원과 달리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는 물론 정부수립 이후에도 정부의 의료정책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 온 양의학 위주의 기조가 깨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당연히 한의사 제도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한의사는 여전히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격하시켜 정한 호칭인 의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한의계의 뜻 있는 인사들은 일제에 의해 도태된 한의학을 되살리고 한의학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현재 대한한의사협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의사회의 설립이었다.

조선의사회 설립 움직임은 1945년 10월 경기도의생회로부터 시작됐다. 김동훈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모여 전국적인 규모의 한의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의업에 종사하던 의생들 중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이 조선의사회의 창건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배원식 선생의 경우도 당시 30세의 가장 어린 나이에 협회 설립을 위해 적극 참여했다.

이 때 조선의사회 설립을 위해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들은 지금도 한의계에서 큰 어른들로 추앙받고 있는 박호풍(朴鎬豊), 김영훈(金永勳), 박성수(朴性洙), 김동훈(金東薰)선생 등으로 이 중 박호풍과 김영훈 선생은 왕조시대 전의(典醫) 출신이다.

이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1945년 11월 3일 마침내 조선의사회가 결성되고 박호풍 선생이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한의계 원로들, 한의학 정체성 회복 위한 조선의사회와 동양의학회 설립

숱한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사회를 설립한 이들은 민족의학의 위치확립과 후학의 양성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인식했다. 또 한의학 자체의 학술적 규명이 한의학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한의학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학술진흥을 위해 동양의학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동양의학’을 발간하는 한편 동양학관이라는 한의학 강습소를 설립했다.

이후 한방강연회를 개최하고 협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각종 질병의 한의학적 치료에 대한 임상강의를 실시하는 한편 한의학의 학술적 규명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사실 정치와 경제, 의료 전 분야에 걸쳐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던 해방 이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태동한 동양의학회와 동양학관의 임상강의와 연구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한의학을 되살리고 한의학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임상강의를 하고 학술연구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진정한 한의학의 해방을 위한 첫 걸음으로서 그 의의가 자못 크며 이러한 노력은 이후 동양의학전문학원 개강, 동양대학관 탄생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다.

하지만 이처럼 의욕적으로 시작한 조선의사회와 동양의학회, 그리고 동양학관 중심의 한의계 인사들의 활동은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련을 맞게 된다. 바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사회 설립을 주도하고 동양의학회를 결성, 동양학관이라는 한의약 강습소를 열어 한의학과 한의계의 위상 정립을 위해 분투하던 이들의 노력은 전쟁이라는 참화조차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1.4 후퇴로 내려간 피난지인 부산에서 당시 부산에 거주하던 한의사들과 힘을 모아 한의학과 한의계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의 노력은 전쟁 중이던 1951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천신만고 끝에 국민의료법 통과라는 결실을 통해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국민의료법을 통과시켜 이 땅에 오늘날의 한의사제도를 탄생시킨 셈이었으니 그야 말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 그대로 ‘포화 속에 핀 꽃’이라는 표현이 맞는 셈이었다. (계속)

 

이종안 / 배원식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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