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 因果를 넘어 希望으로
상태바
[독자칼럼] 因果를 넘어 希望으로
  • 승인 2004.01.16 1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오 중 완(서울 동제한의원장)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미래는 ‘다가오는 시간을 향해 투사한 의식’이 되었다. 이 의식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과거로 가지면서 지금 목전의 것을 현재로 인식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를 먼저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의식을 미래로 투사할 수 있다.

미래가 과거와 현재의 바탕 위에서 존립하기 때문에 이른바 예측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예측한다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속에 포섭시켜서 이해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카오스를 견딜 수 없어서 기어이 코스모스로 만들고 마는 인간의 연약함,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하여 사람들은 미래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런 것에 대하여는 두려움 이외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치는 데 因果律만큼 훌륭한 무기가 없다. 인과율은 미래에 대한 합리적인 예측을 위해 만들어졌다. 인과율을 통해 예측되는 결과는 미래에 속한다. 합리적 예측을 통해 미래는 더 이상 無知에 속하지 않는다. 예측된 미래는 과거와 현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합리적인 미래는 예측불가능한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인과를 벗어나는 사건을 偶然이라고 하거니와 우연이 많아질수록 사람은 더욱 불안해진다. 그런 미래를 피하려고 인과율을 만들었으므로 합리적인 미래에서는 우연을 용납할 수 없다. 우연이 용납되지 않는 곳에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있을 수 없다.

인과가 삶에 안정성을 부여한다면 새로움은 변화와 활력을 가져온다. 인과를 벗어나는 우연은 그런 새로움을 나타낸다. 인과의 계열 밖에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이 희망이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이끌려 나온 것이 아니므로 의도되거나 기획되거나 투사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의 미래를 나타내는 희망은 예측가능한 어떤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인과 곧 과학적 인식이 아니라 의지와 결단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無知의 世界를 두려워하여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까지 삶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희망이 필요하다.

緣起의 說法을 들은 후에 싯달타는 그렇게 嚴整한 法道가 있는데도 涅槃이 가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열반은 연기의 귀결 이상의 것인 듯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에 답을 주는 대신에 고타마 붓다는 ‘현명한 질문’임을 드러내었다. 합리적 인식을 넘어서는 현명함이 희망으로 나가는 의지와 결단의 근거다. 새해를 맞는 한의계에도 현명한 희망이 필요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