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7] 暘谷 趙世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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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7] 暘谷 趙世衡
  • 승인 2003.12.3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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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침법의 체계적 연구 정립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현업에선 은퇴했지만 개원활동을 한 임상가로는 드물게 평생을 학문적 연구에 몰두하며 한의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쏟아부은 暘谷 조세형(78) 선생.

한의계에 기념비적인 연구업적으로 남아있는 ‘사암침법체계적연구’를 집필할 당시 건강이 악화돼 중도에 쓰러질 정도로 고난도 따랐지만 7년 만에 어렵게 일구어낸 작업이었던 만큼 지금은 후배 한의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책이다.

1926년 경기도 안성 태생인 양곡 조세형 선생은 당시 이천군수인 아버지와 엄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세 살 되던 해 바위 위에서 놀다가 떨어져 다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결국 늑막염에 걸려 사경을 헤맬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지만 병원도 없고, 치료방법도 마땅치 않던 시대상황 때문에 손도 제대로 못써보고 지금까지 호흡기 질환을 안고 살아오고 있다. 이것이 후에 그가 한의대에 가게되는 계기가 된다.

고교를 졸업하고 고려대의 전신이었던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뜻하는 바가 따로 있었던 탓에 대학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다.
이후 고향에 있는 안청중학교에서 약 3년 간 국어교사 생활을 하게된다.

그는 당시의 교사생활에 대해 “때묻지 않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함께 여행도 다니고 뛰놀 수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즐거웠던 때”라고 기억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이었는지 자연스레 한의사를 꿈꿔왔던 그는 결국 교사생활을 접고, 1961년 서른 다섯 나이에 경희대의 전신인 동양의약대 한의학과에 편입학한다.

대학3학년 때는 과대표를 맡으면서 과 학생들과 편찬위원회를 조직해 당시 교수들과 선배들의 우수처방을 모아 졸업 즈음 상병별로 정리한 ‘동의임상처방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또 동양의과대와 원광대 한의대 등에서 교수로 지낸 김기택 선생이 조직한 ‘고금의학회’에서 학술부장을 맡으면서 7~8년 간을 공부했다.

양곡 선생은 “생각해보면 당시에 학술다운, 정말 학리에 꼭 맞는 한의학을 배울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한의대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아카데미한의원’을 개원한 양곡 선생은 본격적인 임상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평소의 뜻이기도 했던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고전침 수기법에 대한 연구에 심취했다.

그는 바쁜 임상활동 중에도 틈틈이 ‘침구대성’이라는 고전을 중심으로 침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찾아 읽고 분석했다.

그중 불필요한 수기법은 버리고 좋은 수기법만을 골라내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보침법, 사침법, 보사겸용침법 등 세 가지 수기법의 표준형을 만들어내게 됐다.

이렇게 그가 古典針手技法을 체계적으로 분석, 연구해 누구나 알기 쉽도록 만든 책이 79년에 출간된 ‘고전침수기법의 체계적 연구’라는 창작논문집이다.

이후 침 연구의 여세를 몰아 사암침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한의계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기게된다.

그는 사암침법 연구를 통해 학리와 임상의 일치로 한의학의 진가를 재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조후기인 400년 전 사암도인이란 사람이 음양오행, 장부허실설 등에 바탕을 두고 만든 사암침법은 그 효과가 신비스럽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뜻이 심오해 활용도 못하는 수수께끼의 침술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학자들이 이 사암침법을 ‘오행침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해외에 보급 선전하고 있어 한의계에선 부끄러운 일로 여기고 있었다한다.

양곡 선생은 “사암침법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침서를 겉핥기로만 읽고, 그 핵심원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결국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양곡 선생은 지난 1986년 약 3천년간의 한의학 근본원리에서부터 종합적인 고찰, 일목 요연한 요약·정립을 통해 임상가가 보고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한 439페이지 분량의 ‘사암침법체계적연구’를 펴내 현재 한의계내에서 침법에 관해서는 교과서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는 학계의 애로사항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으로 다방면의 관계문헌을 섭렵했다. 그렇게 사암침법의 기본구성을 요약 정리하는 한편 스스로의 체험에 의한 연구방법을 사용했다.

또 그 핵심원리인 장부변증에 의한 허실감별법을 논증하고 발병빈도가 높은 여러 증상의 임상실제를 구체적으로 논술하기 위해 애썼다.

양곡 선생은 “針學은 ‘內經’과 難經’에서 시작되고 있는데, 일반 散針法이 있고 子母補瀉法도 있다”면서 “舍岩針法은 五行의 子母補瀉法을 진일보하게 발전시켜 五行生剋 관계의 補瀉를 가미한 것으로 臟腑의 病變을 잘 조화시키는 독특한 침법”이라고 설명했다.

컴퓨터도 없어 원고작성이 마땅치 않던 시절 그의 옆에서 ‘사암침법체계적연구’의 내용정리와 원고작성을 정성스레 도왔던 정찬길 교수(현 세명대 한의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침법이 거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양곡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깊어 ‘사암침법’의 집대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양곡선생님의 이런 면모들이 후학들이 본받아야 할 점으로 공부에 매진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1995년 사암침법체계정립 기념사업회에서는 ‘사암침법체계정립기념비’를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 세우면서 양곡의 업적과 함께 고희연을 축하하기도 했다.

또 지난 2002년 5월에는 사암침술의학이 양곡 선생에 의해 재정립된 것과 전통의학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받아 안성시문화원으로부터 ‘사암침법 문화재’라는 지역문화재로도 지정돼 문화유적으로서도 인정을 받게 됐다.

그는 “지금은 머리가 좋은 후배들이 많아 더 바랄 것은 없지만 최근 사암침법에 대해 독일에서 관심을 갖고 있어 조만간 독일어로 된 사암침법 서적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그러한 열의들에 뒤처지지 않도록 우리 한의계 후배들이 더욱 분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한편 양곡선생은 슬하에 두아들이 있으며, 현재는 대한형상재단 이사장인 큰 아들 조성태(48) 박사가 그의 대를 이어 서울 신림동 아카데미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다.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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