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경기도북부한의사회 세미나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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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경기도북부한의사회 세미나 주제 발표
  • 승인 2003.12.0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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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許浚의 일생과 업적(下)
誤字투성이 묘소옆 重建碑 바로 잡아야


한 대 희 (서울 한대희한의원 원장)


선생의 일생만을 略述하면,
▲1539년(己亥) 3월 5일(推定) 경기도 孔岩(현 서울 강서구 가양동) 출생으로 추정.
▲1557년(丁巳 19세) 5월 12일 허준 친필 서찰 발견.
▲1568년(戊辰 30세 선조 1년) 柳希春의 眉巖日記에 허준 등장.
▲1575년(乙亥 37세 선조 8년) 허준은 名醫 安光翼과 함께 宣祖를 診脈(선조실록).
▲1581년(辛巳 43세 선조 14년) 허준이 내의원 僉正(종4품)일때 왕명으로 纂圖方論脈訣集成 발췌 교정.
▲1592년(壬辰 54세 선조 25년) 4월 14일 임진왜란 발발, 어의 허준은 義州까지 선조를 扈從.
▲1594년(甲午 56세 선조 27년) 5월 이상의의 少陵集에 太醫許浚으로 기록.
▲1596년(丙申 58세 선조 29년) 5월 11일 許浚, 儒醫 鄭석, 太醫 楊禮壽, 金應鐸, 李命源, 鄭禮男 등에게 의서를 纂輯하라는 命이 내려 設局하고 撰集 착수.
▲1597년(丁酉 59세 선조 30년) 1월 정유재란으로 의관들이 離散하니 편찬작업이 중단되자, 허준에게 단독으로 작업할 것을 명하다.
▲1601년(辛丑 63세 선조 34년) 8월 御醫이자 正憲大夫 知中樞府事의 職任으로서 난리통에 없어진 救急方, 痘瘡集, 胎産集을 언해하여 펴내라는 왕명을 받다.
▲1604년(甲辰 66세 선조 37년) 6월 25일 허준에게 忠勤貞亮 扈聖功臣 3등을 하사.
▲1605년(乙巳 67세 선조 38년) 司諫院에서 어의 허준 등을 탄핵.
▲1607년(丁未 69세 선조 40년) 諺解救急方(2권2책)(筆寫本,不分卷 1책, 故金斗鍾博士 所藏)간행.
▲1608년(戊申 70세 선조 41년) 諺解胎産集要(보물 제1088호, 1책, 奎章閣 所藏)와 諺解痘瘡集要(1책, 奎章閣 所藏) 開刊. 2월 1일 선조 崩御시까지 御醫로 근무. 3월 17일 門外 黜送, 3월 23일 中途付處(일정한 곳에만 머물러 있게 하는 형벌의 한 종류), 4월 24일 圍離安置, 11월 22일 귀양을 풀어주라 하다.
▲1610년(庚戌 72세 광해 2년) 8월 6일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함에 따라 간행 명령.
▲1612년(壬子 74세 광해 4년) 纂圖方論脈訣集成(보물 제1111호, 4권4책, 奎章閣 소장), 內醫院에서 開刊.
▲1613년(癸丑 75세 광해 5년) 東醫寶鑑(보물 제1085호, 25卷25冊, 奎章閣 所藏)이 乙亥字體의 訓練都監字 木版本 活字체로 인쇄 완료하여 25권25책으로 간행. 新纂벽瘟方(보물 제1087호, 1책, 奎章閣 소장)과 벽疫神方(보물 제 1086호, 1책, 奎章閣 소장) 刊行. (以上의 허준 저서 7종은 1992년 驪江出版社가 影印 발행한 韓國醫學大系에 모두 수록되어 있음).
▲1615년(乙卯 77세 광해 7년) 8월 17일(양력 9월 9일) 강서구 孔岩에서 서거(추정), 11월 13일 論功하여 府院君에 오르고 報國의 加資를 追贈.

許浚 聖賢의 업적을 든다면 많은 醫書 편찬을 들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많은 醫家가 있었지만 허준을 獨步的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허준선생의 호는 『龜岩』으로, 탑산의 별칭이 『龜岩』이라 하고 8폭 병풍에 『陽川許浚』이라는 낙관휘호가 보이는 것은 아호와 함께 허준은 자신의 고향과 자란 곳을 암시하고 있으니 탑산 근방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龜岩은 가양동 塔山의 別名이라고 손주영(서울 강서구청 근무) 씨는 03년 7월 28일자 강서양천신문에서 주장한 바 있다.

고대인들은 東方에 靑龍, 西方에 白虎, 南方에 朱雀, 北方에는 玄武의 方位神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거북바위(玄武)는 풍수지리설에서 북쪽을 방위하며, 水氣를 맡은 太陰神으로 거북의 두꺼운 껍질에서 방패를 연상하며, 강변의 수호자로서 방어개념의 상징적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제작할 때에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물을 지키는 방어적 개념의 거북(玄武)사상을 담았기 때문에 거북선 제작에 同意가 쉬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이 들어설 서울 강서구 가양동 塔山(해발32.5m)은 聖所(隧穴祭儀處)를 지키는 龜岩(거북바위)이다.

탑산은 백제초기부터 하남위례성에서 서쪽 동굴에 해당되는 위치로 隧穴祭儀式을 치루던 장소로서 신앙지였으며, 이곳에 『津山寺』라는 사찰이 있었고, 그후 사찰은 없어지고 탑만 외로이 남아 있어 『塔山』이란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옆에 있는 공암나루(孔岩津)는 강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고, 성소는 보호되어야 하므로 거북신앙이 결합되어 강변을 지키는 거북바위(玄武)사상으로 변천한 것으로 보여진다. 탑산이 바로 聖所인 것이다.

孔岩을 龜岩(거북바위)으로 지칭하기도 하며 허준기념사업이 시작되기 전인 1991년 4월 초만 해도 탑산을 하늘에서 보면 거북이가 현 허준동상 쪽으로 기어가는 모양이었다.

따라서 한강 서부지역에서 고대사회의 제일가는 聖所가 이곳 탑산이며, 탑산이 바로 거북바위(龜岩)였던 것이다. 오늘에 와서 우리들은 이곳에 총 소요예산 85억여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5층, 연면적 2,098평의 웅대하고도 역사적인 대한한의사협회 회관을 2005년 완공 목표로 오는 16일 창립기념일에 착공식을 갖게 된 것이다.

2000년 2월 21일 사단법인 의성허준기념사업회 제3회 정기이사회에서는 『허준의 역사를 비교적 소상히 파헤쳐 허준의 일대기를 재조명하는데 기여한 한대희 이사에게 그동안의 勞苦를 격려하고 지속적인 허준 연구를 위한 연구활동비 1,000만원을 지원하기로』 決議(한의신문 2000. 2. 28자)했으나 당시 금액을 증액시키자는 감사의견까지 제시했던 姜某 감사가 후일에는 이상한 이유를 붙여, 자기가 全的인 책임을 지겠다면서 반대해 결국 200만원만 지원받고 종결되었다.

만약 감사의 견해가 지당하다면 기념사업회 理事會議의 再論에 회부하여 再檢討를 하였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허준선생 기념사업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무엇보다도 1991년 4월 “허준 선생의 유적이 발견된다면 그곳에 조그마한 빗돌이나 하나 세우자”면서 독려했던, 당시 경희대 한의대 동문회 文鍾화 회장의 공이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필자에게 한가지 소망을 묻는다면 “내용도 틀리고 誤字 투성이인 허준선생의 묘 옆에 서 있는 重建碑를 다시 쉬운 한글로 써서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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