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경기도북부한의사회 세미나 주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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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경기도북부한의사회 세미나 주제 발표
  • 승인 2003.11.2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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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許浚의 일생과 업적(上)
허준 묘소와 출생년도 밝힌 것 큰 성과


한 대 희 (서울 한대희한의원 원장)


최근 의성 허준 묘역 재정비와 함께 재실 완공을 기념하는 허준묘역성역화 기념 세미나가 경기도북부한의사회 주관으로 지난 11월 29일 경기도 파주 유일레저콘도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된 한대희 박사(서울 한대희한의원장)의 ‘인간 허준의 일생 및 업적’을 2회로 나누어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주>

지금 우리 韓醫學界는 허준 선생에 대하여 긍지를 가져도 좋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동안에 몰랐던 墓所의 위치와 확인되지 않았던 出生年度 그리고 小說로 가득 채워졌던 7년간의 空白을 찾았기 때문이다.

최근 10여년 사이 韓醫師들의 손에 의하여 50여 년간 잃어 버렸던 선생의 묘소를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번지에서 찾아 복원하고 그동안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힘입어 선생의 歷史도 상당 부분 밝혀졌다.

묘소 발견의 제일 공로자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에 사시는 鄭在煥(1913년생)님이다. 또 발견 당일(1991. 9. 30) 지뢰地帶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안내했던 공태규 下士도 잊을 수가 없다.

鄭노인은 어릴 때부터 자기네 宗山의 옆 산인 許氏네 宗山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분명히 허씨네 높은 분이란 것만은 알고 있었고, 이에 허준 선생의 묘를 찾기 위해 국방부에 족보상 기재된 長湍郡 下浦里 廣岩洞(현 坡州市 津東面 下浦里)의 안내를 要請했던 경희대학교 한의대 동문회 學術調査團(단장 文鍾 화)에게 위의 사항을 알려 왔고 이에 91년 9월 30일 조사단과 허씨 대종회 관계자, KBS 취재팀등이 군부대의 안내로 현장을 방문, 허준의 묘소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이날은 문화부가 제정한 ‘허준의 달’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묘소 발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의성허준기념사업회서 발간하는 『龜岩學報』 2호(1992. 9)에 『醫聖 許浚의 失傳墓所 發見 顚末』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바 있다.

그리고 歷史的 事實도 몇 가지 밝혀졌다.
그것은 진주박물관에 취재를 갔던 KBS 팀에게 韓洙 학예연구사가 “太平會盟圖”를 알려 줘서 허준 선생이 己亥年生이라는 것을 서울대 규장각의 金湖선생이 TV를 통해 소개하였고, 필자는 明의 諸學士가 歎服했다는 崔笠(雅號는 簡易 1539~1612)이 저술한 『簡易文集』에서 기념사업회 許重瑞 이사와 함께 문집 8권의 “休暇錄”에서 다음의 글을 찾았다.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조정으로 돌아가는 동갑인 대의 양평군 허준에게 주다)에서 허준 선생이 1539년생인 최립(簡易)과 同庚(同甲)임을 알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허준 선생이 1539년생이란 사실이 이제 두 곳에서 밝혀지게 됨으로써 出生年이 더욱 確實해진 것이다.

『眉巖日記』는 1991년 9월 “醫聖許浚의 生涯 및 業蹟에 對한 再照明” 심포지엄에서 李鍾馨 선생이 학계에 소개한 이후, 1992년 11월 전남 담양군 담양향토문화연구회 李海燮 회장이 『眉巖日記』를 5권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를 筆者가 보고 허준 선생에 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宣祖實錄』을 다시 조사하였다.

필자는 1575년(선조 8년) 2월 15일 허준 선생이 안광익과 함께 선조를 진료했다는 宣祖實錄 記錄 以前의 허준선생의 활동기록을 미암일기에서 30여 개의 관련 항목을 찾아내 1999년 12월 17일 한국의사학회와 한국한의학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제중신편 발간 200주년 학술발표회」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許浚에 關한 새로운 事實”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바 있다. 이 부분이 바로 「小說 東醫寶鑑」에 나오는 의관이 되기 이전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에 해당되는 부분인 것이다.

여기에서 1568년 1월 29일 『眉巖日記』의 저자인 柳希春이 사헌부 장령으로 재직할 때 서울 사직동으로 가서 새 海南郡守 이사영을 찾아 보고 집으로 돌아오니 허준도 왔다 갔다고 日記에 記錄된 것이 허준 선생에 대한 最初의 記錄으로 筆者는 보고 있다.

또 1569년 閏6월 3일 대사성인 류희춘은 허준을 위하여 吏曺判書인 홍담에게 편지를 써주었는데, 「日記」의 1569년 7월 2일 “허준이 류희춘에게 인사를 오다”라는 내용을 볼 때 아마도 이때 허준이 內醫院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牛溪先生集』 4권 43쪽에는 朱子學의 大家인 名儒 成渾(牛溪 1535~ 1598)과 詩人이면서 政治家인 鄭澈(松江 1536~1593)과의 1587년 9월의 서찰에서도 허준(49세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이를 보면, 「허준이 와서 말하기를 지난번 이경로를 만났더니, 노형이 술을 끊고 수양해서 얼굴이 붉은 옥과 같으며 술 때문에 생긴 코끝의 붉은 반점도 모두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더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1594년 5월 李尙毅(少陵 1560~ 1624)가 저술한 『少陵集』 1권 10쪽에 허준(56세때)이 太醫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이상의가 중풍에 걸려 위독하자 정작과 太醫 허준을 초청하여 손수 약을 달여 올리고, 밤에 허리띠를 풀지 않기를 한달 가까이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도 허준 선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병풍내용 끝에 『陽川 許浚』이라는 낙관휘호를 쓴 8폭 병풍이 발견되었고, 淸鹹生護湯과 散好湯에 대한 處方箋도 전해지고 있다. <계속>

■ 필자약력 ■
△ 경희대 졸(한의학박사)
△ 한대희한의원 원장
△ 대한한의사협회 40년사 편찬위원장, 경희대 한의대 동문회 학술이사, 醫聖許浚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龜巖學會 초대회장 역임
△ 저서 『실록 허준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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