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 이름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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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이름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
  • 승인 2003.11.21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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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중 완 (서울 동제한의원 원장)


하이데거는 말[言語]을 인간의 실존이라고 하였다. 말은 단순한 음향이나 음성이 아니다. 의도, 가치관, 지식, 품격 등 말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 그래서 말을 인간의 실존이라고 한다. 말로써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므로 삶을 바로 세우려면 말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말이 바르지 않으면 소모적인 분쟁과 갈등이 생겨날 수 있다. 말에는 권력 곧 힘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급이나 집단에 따라 사용하는 말이 다르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이에 형성된 관계가 언어에 반영될 뿐만 아니라 언어 내적인 층차에 의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권력관계가 정립되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대개 개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개념이라는 것들이 결코 평등하지 않다. 개념에는 많은 층차가 있다. 보다 보편적인 개념이 보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개념을 지배한다. 이것이 인간관계에도 투영되어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의 관계가 권력관계의 불평등을 만들어 낸다.

가장 쉬운 예는 남녀의 불평등이 언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조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사람이라는 상위개념 아래 남자와 여자라는 하위개념이 대등하게 있으므로, 그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할 수 있으나, 서양의 언어에서는 대개 인간(man)과 남자(man)가 같은 말이면서 여자(woman)는 남자로부터 파생되는 말이 된다. ‘남자’는 ‘인간’이고 ‘여자’는 ‘인간’ 보다 하위의 개념이 된다. 이로부터 ‘인간’인 ‘남자’는 ‘여자’에 대하여 상위개념이 된다. 이것이 의식을 규정하면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한 것이 된다.

우리나라 말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남학생들만 다니는 학교 예를 들어 고등학교는 그냥 ‘고등학교’인데, 여학생들만 다니는 고등학교는 반드시 ‘여자 고등학교’다.
만약에 남녀가 전적으로 평등하게 생각된다면 ‘○○남자고등학교’, ‘○○여자고등학교’라고 되어야 맞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그런 생각을 하나? 그런 것이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언어에 의해 의식을 지배당하고 있다.

의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의료현실에는 양의학과 한의학이 양립하고 있는데, 용어상에서는 ‘의학’과 ‘한의학’이 있을 뿐이다. 개념상 ‘한의학’은 ‘의학’의 하위 종속 개념이다. 이런 말의 차별이 현실의 차별로 이어져서 한의학은 의학보다 못한 것, 열등한 것, 보조적인 것이 되었다. 한의학이 결코 양의학을 보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사람들은 한의학을 양의학에 종속시키게 된다. 마치 여자를 남자에게 종속시키듯이.

이렇게 생겨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약분쟁은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누가 봐도 약사가 한약을 조제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데, 현실이 결국 그렇게 돌아간 데는 언어의 착각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약사’가 아니라 ‘양약사’가 ‘한약’을 조제하려 한다는 것이 일상 언어에서 분명했다면 양약사의 한약침탈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약사’를 꼭꼭 집어 ‘양약사’라고 불러왔다면 ‘양약사’ 자신들도 감히 한약을 탐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의학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말을 바로세우는 것도 포함된다. 이번 양의사의 한약조제문제를 다루는 복지부의 태도도 말이 바로 서지 않은 데서 나오는 방만함이라고 할 수 있다.


■ 필자약력 ■

△서울대 철학과,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경희대 한의대, 경희대 대학원 한의학과 졸업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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