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22] 다움 류기원(경희대 한의대 교수)上
상태바
[한의학은 나의 삶22] 다움 류기원(경희대 한의대 교수)上
  • 승인 2003.11.07 14: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국내 한방병원의 발전적 기틀 마련


한의학이 좋아 한의학을 하게 되었다는 말은 틀린 말인지도 모른다. 우연히 업으로 삼다보니 한의학이 좋아진 것일 뿐.

그렇게 한의학을 떠나지 못하고 한의계 사람으로 남아있는 한, 다움 류기원(63·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난치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을 놓을 수가 없다. 이제는 어떠한 명분과 당위성 때문이 아니라 40여년이란 세월과 함께 쏟아부은 그의 피와 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은 한의학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다.

찬바람이 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가을날 아침 찾은 경희의료원 제3내과 류기원 교수 연구실. 그 안에 빼곡이 채워진 낡은 서적들은 한눈에 그의 지난 43년을 보여주는 듯했다.

1940년 인천시 강화군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하지만 6.25가 일어나면서 그의 집 농사를 거의 맡아 하던 작은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부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공부에 어느정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극복하면서 입시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1958년 대학입시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워낙에 낙천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 탓에 좌절하지 않고 2년간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대입 재도전을 준비했다.

■ 낙천적이면서 적극적 성품

입시를 준비하는 와중에서도 공부하고 싶어도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야학을 꾸리기도 했으며, 4H클럽이라는 민간봉사단체에서 농촌계몽운동 등 봉사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60년 그가 애초 원하던 심리학과는 아니었지만 주변의 권유로 동양의약대학(경희대한의대 전신) 한의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당시 4.19가 일어나는 등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대학내에서도 재단과 교수들의 비리 때문에 연일 끊이지 않는 데모로 다소 시끄러운 분위기속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주변 분위기와 더불어 당시 원전을 해석하는 수준에 불과했던 수업에 염증을 느낀 류교수는 한의학은 비과학적이고, 뒤떨어진 학문이 아닌가라는 다소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던 대학 2학년때 윤길영·노정우·한승련 선생 등 새로운 교수진들이 등장하면서 한의학에도, 류교수의 마음과 머릿속에도 신선한 바람이 불게 된다.

이때부터 류교수는 본격적으로 약초채집을 다니게 되었고, 한의학에 대한 관심과 학문에 대한 열의도 조금씩 싹틔워 나갔다.

또 이론위주의 수업이 진행되던 1, 2학년 때와는 달리 임상위주의 수업이 진행되던 3학년때는 조별로 각각의 병명에 따른 세분화된 실습을 하게 되었는데 류교수는 당시 이러한 실습이 지금의 현대적인 실습의 효시가 된 것 같다고 회고했다.

특히 류교수는 윤길영 선생 밑에서 실습하면서 맹장염의 치료통계를 내어 정확도를 측정하는 등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한 작업도 시도했다.

또 1964년 윤길영 선생이 이끌던 공부모임인 방제반 학생들은 동양의약대 부속 한의원(서울 돈암동 소재)에서 나온 처방들을 일일이 분류하는 작업과 개원의 중 유명하다는 한의사들을 수소문해서 우수처방을 수집 정리한 ‘동의 임상처방집’이란 자료집도 만들었다.

■ 학생시절 동의임상처방집 펴내

이후 7년만인 71년 이 책은 ‘동의 새 임상처방집’이라는 제목의 인쇄판으로 발간되었다.
이처럼 학생시절부터 적극적인 노력을 인정받은 류교수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학교에 내과학 조교로 남게 되었다.
그러면서 재학시절 경험했던 실습 노하우를 바탕으로 후배들의 실습지도를 도맡아 하기도 했다.

68년도부터는 경희대 한의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때 한의계 소화기내과에 양방병명도 도입한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왜 양방병명을 한의학에 쓰냐는 반발도 있었다고 한다.

류기원 교수가 본격적으로 경희대에 몸담게 된 것은 71년부터.
그는 서울의 유명 병원장의 이름을 들며 “나보다 잘난 제자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것도 보람으로 느끼는 일 중 하나”라고 했다. 또 “70년대나 지금이나 향학열은 비슷하지만 70년대의 학생들보다 지금 학생들의 실력수준이 훨씬 더 높아진 것 같다”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흐뭇해했다.

그는 71년 경희의료원 한방병원 설립당시부터 병원 개원에도 참여했다. 설립 당시 이종형·구본홍·김영만·최용태·배명의·노정우 그리고 류기원 교수 등 모두 7명이 이 병원 개원멤버다. 류교수는 이후 시내 한방병원장과 경희의료원 한방병원장 등을 지내기도 한 병원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 경희대 한방병원 설립에 참여

또 지난 1960년대부터 난치병, 특히 암이나 성인병 등의 치료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대한한방종양학회와 대한한방성인병학회 등의 설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내과학회장, 종양학회장, 성인병학회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방치료의 분야를 넓혀가는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런가하면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대한한의사협회이사 및 한의학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의학의 임상적·학술적 발전은 물론, 1986년 대한한방병원협회장을 지내게되면서 초보적 수준에 머물렀던 국내 한방병원의 발전적 기틀을 마련했다.

또 1986년에는 한방의료보험 실행위원을 맡게되면서 시범적으로 일부지역에 국한돼 실시되던 한방의료보험을 87년부터 전국에 있는 한의원에 확대 실시되도록 하는데 공헌했으며, 그밖에도 1998년 국시원분과위원장, 2000년부터 2001년 1월까지 경희대 동서의학대학원장 등을 두루 거쳤다.

4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불리고 있는 ‘다움’이라는 그의 호는 순수한글이다. 호는 모두 한자로 지어야한다는 고정 관념을 깨고 싶었다는 류교수는 이와 함께 자랄 당시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는지 그는 한글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고 한다.

류교수는 “‘다움’은 말 그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교수는 교수답고, 의사는 의사답게 즉 가지고 있는 이름과 위치에 걸 맞는 사람이 되자는 뜻에서 지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계속>

강은희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