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5] 志山 林達圭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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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5] 志山 林達圭 선생(下)
  • 승인 2003.10.3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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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춘 삶 짧은 생애, 긴 발자취 남겨


지산은 학교시절부터 명처방을 수집하고 틈나는대로 그 내용을 분석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선친의 진료실에서 임상실습을 하며 의인의 길을 준비했다.

그는 한번 진료했던 환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질병을 치료함에 있어 한의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효과적인 진료를 위해 유연한 자세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양방의 과학적인 병인 진찰이 탁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양방 의사와 친교를 맺어 환자들에게 X레이 촬영을 하는 등 지금으로 말하면 동서의학협진의 형태로 진료했다.

1982년 대전대 부속한방병원을 개원할 당시에 혜화당한의원에는 이미 초음파기를 두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한의사가 된 아들 임민철(35)씨는 “어린시절 부친의 진료를 기억해보면 진맥이 신속하면서 정확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면서 “부친의 처방 중 상당부분이 대전대 부속한방병원에서 응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충분히 일가를 이룰 만큼 자산을 모아 주위에서 자가용을 굴릴법하다고 여겼지만 지산은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조금 형편이 나아졌다고 차를 산다면 이 땅은 차로 뒤덮이지 않겠는가”라면서 거부했다.

□ 교육과 고향에 대한 애정

지산은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고향(경북 문경시 산양면 우본리) 복지사업에 상당한 투자를 하게 된다.

그는 먼저 마을 진입로와 농로의 확포장 공사비를 전액 부담했고, 전기시설이 들어오지 않는 고향에 배터리를 이용한 앰프시설을 설치했다.

지산은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당 면적의 전답을 구입해서 도로 폭을 넓히고 악천후에도 차량이 마을 한복판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돌과 시멘트로 포장했다.

앰프시설은 주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발소·목욕탕·도서관·마을회관을 짓고 농촌의 빈곤한 자금사정을 고려해 사재로 공공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의원 직원을 비롯해 지산에게 일자리를 부탁하러 온 고향 지인들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사업자금을 구하러 오는 이들을 도와주다가 그 업체를 떠맡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사정으로 제지회사, 농장, 양조장, 식품회사, 대전극장 등을 인수하게 됐다.

한편 경제발전과 더불어 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가운데 대전도 마찬가지로 대학증설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지산은 학교법인 혜화학원을 설립, 대전대학 신설 인가를 받아냈다. 이때 이사장의 이름은 형인 임홍규로 서류가 꾸며졌고, 실제 설립자인 임달규선생은 대외적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이러한 육영사업의 꿈은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1950년대 부친은 학교 설립을 계획한 바 있었고 지산은 이꿈을 이어받아 실현시킨 것이다.

본래 지산의 계획은 가정사정 등으로 학업하지 못한 젊은이들을 위한 4년제 야간대학 설립이었으나 계획을 수정, 주·야간 동시모집인가를 받아냈다. 설립후 지산은 “나는 한의사이므로 열심히 환자진료를 하여 얻은 수입으로 학교발전의 초석이 되면 그뿐”이라며 교주인 학교의 이사장직에 오르는 것을 사양했다. 학교 운영에 대해서도 학사행정에 능숙한 교수를 초빙해 맡기겠다는 소신을 밝혔다. 1981년 제1회 입학식에서 260여명의 신입생에게 지산은 단상에 올라가기를 사양하고, 축하객들을 맞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른 새벽에 학교에 와서 아무도 모르게 둘러보기만 할뿐, “내가 나타나면 운영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럽다. 운영을 맡겼으니 소신껏 운영하게 도와줄 뿐 나는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해”라고 했다.

하지만 지산은 한방병원을 중풍전문병원으로 만들고 싶어했으며, 2000년이 되기 이전에 대전대는 ‘재학생, 1만명의 중부권 명문 사립종합대학교’라는 마스터 플랜까지 그려놓고 있었다.

□ 드러내지 않는 덕행

향토사업과 교육사업, 한의원 진료에 동분서주했던 그에게 여행은 단 두차례였는데 이것도 로타리클럽에서의 봉사활동과 관련해 일본과 미국, 그리고 유럽을 돌아본 것이었다.
선행을 쌓으면서도 지산은 이름 내세우기를 극히 꺼렸다.

당시 대전일보 변평섭 편집국장의 회고담 한토막. “신문에 생계문제로 운동을 중단해야할 처지에 빠진 유망한 학생의 사정이 보도됐다. 이후 그 학생을 통해 지산의 도움으로 운동을 계속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산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그는 금시초문이라면서 잡아뗐다. 신문에 싣지 않겠다는 전제를 걸고 거듭 묻자, 그제서야 ‘우리지역의 유망주인 운동선수가 포기하는 것은 지역의 손실이어서 도왔다. 신문에 내 이름을 내면 앞으로는 이런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학교설립은 이루었지만 재정문제는 끊임없는 지산의 숙제였다. 학교의 규모는 커지고 1985년에는 학교부지 확장과 한방병원의 이전문제까지 불거졌다.

대전대학 인근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하고 병원규모도 늘려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시내 중심지인 대흥동에 충남대 의대 부속병원 자리가 났고 지산이 이를 인수했다.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한시간씩 진료를 연장했다.

아들 임민철 씨는 “사업에 앞서 철저히 계획을 하시고, 빚을 끔찍이 싫어하시는 성격이라 학교설립부터 현재까지 은행에 빚이 없었지만, 당시 갑작스럽게 현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자금운용에 신경쓰시느라 무리한 듯 싶다”고 말했다.

과도한 무리로 인해 지산은 간경화로 건강이 악화됐고, 미국 피치버그 소재의 프레스비테리안병원 간 전문센터에서 간이식수술을 받았지만 1988년 10월 향년 58세로 끝내 생을 마감했다.

아내 오응숙 여사(1990년 별세)와의 사이에 2남 3녀가 있으며, 의사인 장남 용철 씨는 혜화학원 이사장직에 있고, 한의사인 막내 민철 씨는 혜화당한의원을 지키고 있다. <끝>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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