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과 신분으로 되돌아본 의학사: 의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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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과 신분으로 되돌아본 의학사: 의사 선생님?
  • 승인 2015.11.0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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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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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연석 원광대 한의대 교수(의사학교실)
 
“우리는 몇 해 전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국가적인 토론을 거쳤다. …… 그러나 역사 바로 세우기의 과정이 정치경제사 분야에 집중된 채 각 세부 분야별로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진행되지 못했다. 의학사(醫學史)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윗 문장은 필자가 2009년 9월, 한 온라인 매체에 “한국의학사 다시 쓰기”라는 이름의 연재를 시작하며 쓴 첫 문장이다. 만 6년이 지나 국사 과목 국정교과서 논쟁이 날로 뜨거워지는 시점에 '월간 독립기념관'에 투고키로 하여 여러 고민을 하게 된다. 동시에 겪은 같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학생들과,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또 그러한 다양성이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의학 분야에서도 우리 역사를 처음으로 기술한 사람은 일본인 미키 사카에(三木榮, 1903-1992)가 있었고, 조선인 김두종(1896-1988)이 그 뒤를 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일본의 제국화가 한창이던 1920년대 일제의 역사관으로 교육받은 (양)의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둘 모두 일본 본토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였고, 미키 사카에는 1930년대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을 거쳐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반면, 1930년대에 만주국에서 활동하던 김두종은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된 공통점도 갖고 있다.

1954년 김두종은 한국의학사[上中世編] 서문에 “사료를 빌려주고 상고사의 민속학적 부분에 가르침을 준 최남선 선생에게 감사하며, 자신의 질문에 깊은 답을 준 존경하는 벗 이병도 박사의 도움이 컸다”는 사례를 담았다. 최남선과 이병도가 친일행적을 했냐 아니냐, 이병도에 의한 실증사관의 영향으로 식민사관이 공고해졌냐 아니냐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김두종은 한국사람으로서 의학사를 기술하였기 때문에 일본인 미키 사카에와 경쟁 관계였다. 하지만 이 경쟁의식이 식민사관과 (양)의사의 관점을 너머서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그의 연구에서 일본인 미키 사케에를 뛰어넘는 문제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탈 식민지시대에 한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사람으로서, 또 한의사로서 의학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식민지시대에 일본에서 교육받은 조선 사람으로서, 또 의사로서 의학사를 기술한 것과는 많이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확인해보기 위해 일제 강점기의 (양)의사인 미키 사카에나 김두종의 의학사 기술과는 다른 관점에서 한국의학사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일제의 침략과 함께 신분과 지위과 뒤바뀐 한의사에 대한 명칭을 살펴보는 것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한)의사는 의원(醫員), 의사(醫士), 의사(醫師) 등으로 불리웠다. 이와 아울러 의생(醫生)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의학을 하는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지방관료 중 의학을 담당하는 낮은 벼슬”의 명칭이기도 하였다.

1900년 대한제국은 「의사규칙(醫士規則)」을 발표하였다. 이 규칙의 1조에 “의사는 의학을 익혀 천지운기(天地運氣)와 맥후진찰(脈候診察)과 내외경(內外景)과 대소방(大小方)과 약품온량(藥品溫涼)과 침구보사(針灸補瀉)를 통달하여 증상에 맞춰 투약하는 자”라 하였고, 동시에 2조에서도 “의사는 의과대학과 약학과를 졸업하고 내부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자”라고 하였다. 제1조는 한의사를, 제2조는 (양방)의사를 지칭하는 것인데, 대한제국 시기에는 한의와 양의 모두를 의사(醫士)라고 명칭하여, 같은 역할을 부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새로운 형태의 병원인 광제원을 지어 위 제1조(한의) 및 제2조(양의)에 의한 의사(醫士) 모두가 똑같이 의술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를 구비하였다.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 의학을 담당해오던 한의들이 새로운 의학을 함께 배우고 시술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서양의학을 배운 양의들도 차별없이 진료하도록 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아 능동적으로 두 의학을 결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기존의 조선인 관료들 스스로가 최선의 진료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구 대한의원 본관 건물(붉은 벽돌 건물). 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박물관.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대한제국의 많은 것을 바꾸었는데, 그 변화의 핵심은 사람이 바뀐 것이다. 하루아침에 친일매국 행보를 보인 사람들 또는 일본인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였다. 1907년 광제원은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바뀌었데, 기존에 근무하던 한의들은 모두 쫓겨났다. 초대 원장은 을사오적(乙巳五賊) 중 하나인 이지용(1870~1928)이었고, 이후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영예를 누렸다. 두달여만의 후임인 임선준(1861~1919)은 제2대 원장이 되었는데,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정미칠적(丁未七賊)으로 꼽히는 사람이며 후에 자작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이완용과 사돈을 맺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지령으로 대한의원의 기획을 맡아온 일본군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左藤進, 1845~1921)는 1907년 제3대 원장이 되었다. 이 때 창경궁의 외원이던 함춘원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착공하고 본격적인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은행 본관(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과 함께 경성의 3대 명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지화 정책의 3대 축이 된 셈이다. 대한의원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인 1926년에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다시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되었다. 사토 스스무에 의해 지어진 대한의원 본관 건물은 여전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병원 홈페이지를 보면 대한의원의 식민지 침탈의 역사는 외면한 채, 국립병원의 측면만을 강조하여 대한의원과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을 자신들의 역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홈페이지에도 대한의원 이전의 광제원은 처음에 한의로만 구성되었다고 밝혀두었는데, 대한의원으로 개편된 이후 한의사들은 대한의원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1913년 조선총독부는 1900년 대한제국의 「의사규칙(醫士規則)」을 뒤집는 내용의 「의사규칙(醫師規則)」과 「의생규칙(醫生規則)」을 발표하였다. 일제는 “의사”를 ‘의료를 시행하는 선생님, 상급 관리, 기술자’의 의미로 (양)의사만를 지칭하게 한 용어로 쓰게한 반면, “의생”은 ‘의료를 시행하는 학생, 하급 관리, 초보자’의 의미로 한의사를 지칭하게 하였다. 한의와 양의를 동등한 의료인으로 규정하던 것에서 한의를 양의보다 낮은 등급의 의료인으로 간주한 것으로서 한의사의 입장에서는 퇴보한 정책이었다.

◇청강 김영훈 사진.(경희대학교 한의학박물관 소재)
하루아침에 평생을 의사 선생님으로 불리우던 기존의 한의사들은 ‘의사’보다 한 단계 낮은 의미의 ‘의생’이 되었는데, 식민지 상황이었기에 자신들에 대한 중대 정책임에도 조선인과 한의사들은 변변한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새로 만들어진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갓 의사가 된 새파랗게 젊은 양의들이 의사선생님으로 대접받는 상황에서, 오래도록 가업을 이어가며 평생을 활동한 조선의 나이 많은 한의들이 받았을 참담한 심정은 식민지 설움의 대표 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양)의사”와 “의생(한의)”의 구분은 일제가 인정하는 의과대학을 졸업했는지, 아니면 한의학의 전통을 계승 및 발전시키려는 조선인들이 만든 민간기관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는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내내 한의학은 정식 학문분야로 인정받지 못하여 대학교육에 편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학교만 나와도 대단하다고 했던 일제 강점기에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는 집안, 또는 일본까지 유학을 가서 의과대학을 다니고, 특수한 신분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경성제국대학의 의과대학에서 수학했던 사람들은 누구의 자제들이었을까? 그리고 해방 이후 보건의료정책의 결정과 의료자원을 독식해나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해방 후 대한민국이 출범하였지만, 한의와 양의는 일제 강점기를 통해 폭력적으로 만들어진 불공정한 위치의 연장선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한 격차는 지금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청강 김영훈 진료기록부 (경희대학교한의학박물관 소재). 청강 김영훈(晴崗 金永勳, 1882~1974)은 1904년 최초의 근대적 한의과대학인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전국의생대회와 전국 규모의 한의사단체를 결성하는 등 일제강점기 한의학 부흥에 앞장섰던 한의사이다.
 ◇청강 김영훈의 진료기록물.(경희대학교한의학박물관 소재)

지난 달 중의학의 치료법에 따라 한약재 청호에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연구팀에게 노벨의학상이 주어졌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중의와 서의를 함께 발전시키라는 교시를 내린 이후 중의학의 연구와 시술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거의 없는 편이다. 이 위대한 과학적 성과는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중국의료체계의 힘이지, 한두 명의 똑똑한 연구자의 힘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전세계가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지식으로부터 결과물들을 찾기 위해 뛰어들었다.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으로 현 우리 의학체계의 문제점을 우리 스스로가 되돌아 보니,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 쉽게 감이 오지 않는가? 창의적 연구도, 창조 경제도 우리의 과거를 다양하게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도출될 수 있다. 우리의 의료체계에서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느끼는가?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의 의료체계를 지배해온 한 의료집단의 관점을 벗어난 유연한 사고를 한다면 그 해법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강연석 / 원광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위 글은 2015년 11월 1일자  '월간 독립기념관' 지에도 함께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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