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4] 無爲堂 李元世 선생(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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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의학을 빛낸 인물14] 無爲堂 李元世 선생(下)
  • 승인 2003.09.05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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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려야 병을 이긴다”
소문학회로 이어진 무위당 정신


1985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무위당은 부인이 평소 잘 다니던 절이 있는 대구 팔공산자락에 유골을 뿌려주었다. 오래 전부터 속세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고 싶었던 무위당은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에 슬퍼하다 그 해 9월 경남 합천 해인사로 수도생활을 떠난다.

홀로 있는 아버지가 염려스러웠던 마음에 큰아들 종섭 씨가 여러차례 드나들면서 부산에 있는 집으로 함께 갈 것을 권유했다. 처음엔 이를 완강히 거부했으나 결국 그 해 12월이 되자 무위당은 제2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는 부산 남구 광안동 큰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대구에서의 임상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온 무위당은 마음공부를 할만한 적당한 곳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부산 남구 남천동 금련산 기슭에 있는 ‘보림선원’이란 곳을 알게 되어 마침 그곳에서 만난 백봉 김기추 선사와 뜻이 맞고, 마음이 통해 시간이 날 때면 보림선원을 찾아가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러다 보림선원이 땅주인의 요청으로 철거되면서 1990년초 진주 근교로 자리를 옮겨 새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무위당은 평소에 틈틈이 써 두었던 서예 40여점을 모아 부산호텔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고, 그 수익금을 보림선원 건축비로 희사하기도 했다.

이후 부산 범어사에 있는 사자암에서 법륜스님과 함께 참선하던 무위당은 여름날 저녁 나무 밑에서 그곳을 찾은 학생들과 직장인들에게 한문과 동양철학, 유교철학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소문학회가 생겨난 것은 1986년. 당시 부산에서 경희대 출신의 친한 선후배 10여명이 공부를 하던 모임이 있었다. 대구에서의 무위당에 대한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차에 이들은 그를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했다.

그렇게 해서 현재 소문학회 학술위원으로 있는 요산 김태국 원장(부산 요산한의원), 소문학회 회장인 우소 황원덕 교수(부산 동의의료원) 등을 비롯한 한의사 30여명이 매주 세 차례 무위당을 방문해 하루 두시간씩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무위당은 한의학의 근본원리를 비롯해 소문대요, 의감중마, 유교사상과 불교사상 등 동양철학, 사서삼경 등 한문도 가르쳤다. 무엇보다 배우러 오는 이들이 환자를 대하는 한의사들이었기에 그는 ‘환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젊은 한의사들이 공부하러 꾸준히 찾아오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강의를 듣고 돌아가는 제자들에게 ‘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매번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가정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으나 공간은 협소해져 1989년 12월엔 인근에 있는 좀더 큰집으로 옮겼다.

한창 제자들을 가르치던 시절인 이때에도 이미 84세를 넘긴 고령이었지만 그는 차츰 가르침에 대한 보람도 느끼고, 애착을 갖게 되었다.

큰아들 종섭 씨(69·해운업)는 “아버지는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을 가족이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애정을 가지셨다”고 회고했다. 그래서인지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시키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것 같다고 했다.

제자들의 간절한 청으로 가까스로 생전에 두 권의 책을 남기긴 했지만 본시 자신과 관련한 무언가를 남기는 것도, 남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했던 그였다.

“공자같은 훌륭하신 분도 책을 남기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 아는 게 무엇이 있다고 책을 내겠는가. 외람되다”며 처음엔 제자들의 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제자들의 청이 계속되자 간신히 받아들인 무위당은 그의 스승이었던 석곡 이규준(1855~1923)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석곡이 동의보감에서 소문의 원리에 맞는 내용을 뽑아만든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등 두 권의 의서를 남겼다.

그의 제자들은 이밖에도 평소 무위당이 공부하고 참선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틈틈이 시로 옮긴 글을 모은 ‘無爲堂雜詠草稿’라는 한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무위당은 어디까지나 사람은 인생관, 인격으로 대하고 위안해서 병을 다스려야 한다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병리공부를 제대로 잘 해서 치료해야지 무슨 처방이 잘 듣더라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은 양심에 부딪치는 일이라고 했다.

무위당은 환자의 病理를 먼저 파악한 뒤에 淸上通中溫下에 입각해 作方을 했다고 한다. 석곡의 부양론과 내경에 나오는 오맥법을 되살려 제자들에게 여러차례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또 병을 초래한 데는 이유가 있다고 보아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七情(喜怒憂思悲驚恐)’을 예로 들며 ‘마음을 잘 다스려야 병을 이긴다’고 강조했다. 의사자신의 마음이 맑고 고요해야 환자의 마음을 열고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번은 그의 가르침을 받던 김태국 원장이 무위당을 찾아와 두 번 절했다. 이유인즉슨 어느 날 환청으로 고생하던 여고생이 양방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자 김원장의 한의원을 찾아왔다.

여고생의 마음상태를 살피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던 김원장은 여고생과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그 자리에서 함께 울고 말았다. 그렇게 약을 지어주고, 차도를 지켜보며 치료하자 여고생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한다.

밖으로 나서지 않는 무위당이었지만 그에겐 수백명에 이르는 한의계 종사자들 외에도 부산대 한문학과 국문학과 교수들을 비롯해 부산시 공무원, 의사, 법관 등 각계각층에서 그의 소중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현재 소문학회 대구지부에서 의맥을 잇고 있는 외손자 송헌 이국형(47) 원장(대구 중화당한의원)은 “어릴 땐 말씀이 너무 없으셔서 무서운 외할아버지로만 생각했었는데 제가 자라서 한의사가 된다고하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더라”며 “요즘도 환자를 진료할 때 할아버지께 배웠던 것들을 많이 쓰고 있는데...이제는 물어보고 싶어도 더 이상 그럴 수 없네요”라며 아쉬워했다.

2001년 8월 18일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진 무위당은 96세를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살아생전 돈을 좇고 물질에 얽매이면 욕심이 생겨 정신이 흐려진다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릴 것을 강조했던 무위당. 주윗 사람들에게 늘 ‘구름같이 살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자신 바로 그런 삶을 살다간 것은 아닐까.

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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