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4주년 기념특집] 한약분쟁! 그후 10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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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4주년 기념특집] 한약분쟁! 그후 10년①
  • 승인 2003.07.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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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직전 100년간 억압과 소외감 고조


□ 싣는 순서 □
① 한약분쟁의 배경
② 한약분쟁의 성과와 한계
③ 바람직한 계승을 위하여


한약분쟁이 올해로 10년을 맞이하는데도 미처 조명되지 못한 감이 없지 않다. 보건의료계에 미치는 파급력이 광범위했으면서도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린 한약분쟁. 집단이기주의라는 늪에서 거짓을 걸러내 한약분쟁 속에 스며있는 가치를 다시 찾아는 일은 한의학이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방대한 사건을 짧은 지면에 다 담아낸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오늘의 시각에서 정리해보고자 했다. 독자여러분의 관심과 질책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① 한약분쟁의 배경

분쟁이 5, 6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방의료기관에 매어 있는 한의사들에게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게 했을까? 그 원인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분쟁과정에서 현재의 존재구조에 미치는 영향까지 감안하면 그렇게 간단치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하나가 때론 분절적으로 존재하면서도 상호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 분쟁의 近因

한약분쟁이 언제부터 시작해서 언제 끝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법조항-그것도 시행규칙 중 한 호-의 삭제로 발단이 되었다.

- 분쟁의 遠因

한의사의 법적 지위는 말 그대로 초라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약사법은 의약분업을 전제로 만들어 한의사의 한약취급마저 제약시켜 놓았다.

한의사가 한약을 취급할 수 있는 규정은 약사법 부칙 한 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양약사의 한약취급을 규제하는 조항은 겨우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제1항 제7호 한 조항밖에 없었다.

그것도 1980년에 만들어진 것인데 한번도 적용된 일이 없어 死文化 되기에 이르렀다.

이 규정은 1975년 국회의 부대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마지못해 신설했던 조항이다. 법의 제정과 시행규칙의 제정에서 폐지까지 일관되게 양약사의 한약취급을 정당화시켰다.

- 사회적 환경

한의계의 시각에서 보면 한의사 고유의 영역인 한약을 아무런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멋대로 취급하는 데 대한 반발의 성격이 컷던 데 비해 보건학계에서는 의료공급구조가 다원화됨에 따른 업권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1950년대 원조경제 시절 한국이 국제제약시장에 편입됨에 따라 약대가 대거 신설돼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약사과잉상황을 맞이한다. 6.25라는 비상상황에서 의료인력동원의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한의학의 법적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의료시장이 다원화된다.

의료공급의 다원화가 곧바로 직종간의 갈등을 유발하지는 않았다. 수요에 비하여 공급이 많지 않았던 ‘자연독점’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공급자가 과잉배출되면서 시장확대 전략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의사와 한의사는 대체재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한양방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다만 의료공급자의 급격한 수적인 증가는 궁극적으로 집단내적 갈등과 집단간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집단간 갈등을 유발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으로 의료공급자들의 직무구조의 단순성을 든다. 단순한 직무로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해 다른 공급자의 시장으로 진출하려 할 때 쉽사리 ‘생존권’의 문제로 인식되게 만들어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것이다.

권위적 정부가 민주적인 정부로 교체된 것도 집단간 갈등이 사회화되는 계기가 됐다.

- 근대 모순의 폭발

업권분쟁의 성격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 주장은 한약분쟁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여성, 비과학, 개인의 가치를 억압받는 우리 근대사의 연장선상에서 한의계가 저항의 몸짓을 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조선의 주류 의학이 외부의 힘에 의해 비주류 의학으로 전락했다면 부당하다는 인식이 싹틀 수밖에 없다.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민족의 여타 부문이 복원되었지만 한의학의 법적 제도적, 사회적 지위는 개선되지 않았다.

- 내적인 주체의식의 고양

사회의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소외를 체감한 젊은 한의사들은 소외의 근대 역사를 주체적으로 타파하고자 하는 의식을 싹틔웠다.

86년 한방의보 전국확대 추진위원회(약칭 의확추) 활동이라든가, 87년 6월 민주화항쟁 당시 들것을 들고 시위현장을 누빈 것, 공중보건한의사제 도입을 위해 시범실시에 적극 참여한 것 등은 한의사가 진료실내에 머무는 소극적인 계층이 아니라 시대를 이끌고 역사적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일부 인사들은 신문을 창간하여 한의계를 둘러싼 현상을 한의사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문은 한의원 단위로 흩어져 있던 한의계 구성원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촉매제 구실을 톡톡히 했다. 각성된 한의사들은 분회와 지부, 나아가 중앙회에 진출하면서 변혁의 주체로 성장했다. 특히 서울시한의사회에서 발간한 정책백서는 초보적이나마 한의계의 외침을 정책대안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한약분쟁에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 문명의 대충돌

한약분쟁은 업권투쟁도 아니요 정치적 투쟁도 아니요 ‘문명의 충돌’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이 막 나온 시점이어서 그런 정의가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과학으로 무장한 양방은 한의학이 비과학적이며 미신, 혹은 플라시보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약을 한의사들에게 맡겨놓으면 한의학이 퇴보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생활 속에서 치료효과를 확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의학에 내재된 철학적인 속성은 국민 개개인의 생활속에 녹아 사유와 행위의 저변을 형성하고 있어 양약사측의 주장에 쉽사리 동화되지 않고 양방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었다. <계속>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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