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4주년 기념특집] 한약분쟁, 어떻게 진행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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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4주년 기념특집] 한약분쟁, 어떻게 진행됐나?
  • 승인 2003.07.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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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단식·유급과 피말리는 협상의 연속


1993년 1월 30일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입법예고되고 3월 15일 관보에 공고됨으로써 한약분쟁의 서막이 올랐다. ‘약국에는 재래식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는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제1항 제7호 조항을 삭제한 것이다. 이 조항은 1975년 국회에서 통과한 부대결의를 이행하고자 1980년 신설됐다.

그러나 그후 13년간 한번도 시행하지 않은 채 사문화되어 한의계의 분노를 샀다. 복지부는 이 사문화된 조항마저 정권교체기를 틈타 법률 정비라는 명목으로 삭제한 것이다. 전체 수입 중 한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80~90%에 이르는 한의사에게 유일한 근거법률의 삭제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로 인식되었다.

한의계는 처음에는 “약국의 재래식 한약장 철거규정은 약국의 한약 임의조제를 금지하여 의약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의도에서 입법된 것이므로 이를 삭제하는 것은 의약질서의 문란을 가져온다고 판단, 이 조항은 현행대로 존속시키고 약국내 재래식 한약장은 철거하여 약사의 한약임의조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번 삭제된 조항은 원상복구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의계의 저항은 점차적으로 조직화되어 갔다. 내부적으로는 무능한 한의협 집행부를 성토하고 공청회를 개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상경집회를 열어 사회문제화시켜 나갔다. KBS 여의도법정에서는 자격이 없거나 혹은 실력이 없는 약사가 한약을 취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점차 투쟁강도가 높아지면서 정부와 정치권이 분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장외투쟁을 장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약사법개정추진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치열한 논리싸움이 전개됐다. 3달간의 밀고 밀리는 우여곡절 끝에 약사법시안이 마련되고 결국 ‘한약사’ 제도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아울러 약사가 무제한적으로 취급하던 한약조제 권한에 제한을 가했다. 최소한의 검증을 거친 약사에 한해 과도적으로 한약을 취급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전문적 교육을 받은 한약사에게 맡기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법은 1994년 1월 7일에 공포됐다. 한의계는 이때까지를 통상 제1차 한약분쟁이라고 부른다.

한편 개정 약사법에는 법 통과 후 5년 이내에 의약분업을 해야 한다고 규정해 정부입장에서 훗날 양방 의약분업을 강제하는 부대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 한약조제약사 대량 배출에 분노

95년경에는 분쟁이 한동안 소강상태를 이룬 기간이지만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약사법개정으로 신설된 직능인 한약사를 배출하는 한약학과를 어느 대학에 설치할 것이냐의 문제를 놓고 한의계와 양약계에서 힘겨루기를 하다가 약학대학에 설치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이런 결과는 한약사제도를 시행하는 힘은 되었을지언정 한약학과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려 수시로 대두되는 통합약사론의 위협에 시달리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본격적인 제2한약분쟁이 시작된 것은 96년 제1회 한약조제약사시험이 공고되면서부터다. 당초 한의계는 한약조제약사시험 응시자격을 가진 약사가 2천명 안팎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2만3천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응시자가 대량 발생한데다가 시험문제 또한 예상문제집에서 베끼는 등 엉터리가 많아 대량합격이 불보듯 뻔하자 출제에 참여한 한의대교수들이 전부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시험이 강행되어 응시자의 97%가 합격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후 합격자까지 합하면 총 2만 5천여명에 이르렀다.

5월 3일 과천에서 항의집회와 삭발식을 마친 한의사들은 집회장소를 조계사로 바꾸어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수천 한의사의 삭발과 목숨을 각오한 무기한 단식농성의 성과는 경실련의 불법 한약조제약사시험 고발 기자회견으로 나타났다. 그 이전에도 수십여 사회단체가 한조시 반대 성명서를 채택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학생들의 수업복귀 투표가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자 당시 한의협 허창회 회장은 사실상의 유급이라며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허 회장을 승계한 박순희 회장도 한의원 휴진 약속을 지키지 못해 취임 석달만에 사퇴했다.

직무대행체제를 거쳐 문준전씨를 신임회장으로 선출했으나 당시 한약재 직거래사업으로 발생한 전집행부의 부채 승계를 거부하면서 내부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서관석 회장과 최환영 회장 재임기간까지 온통 한의계를 짓눌렀다.

약사회도 혼란에 빠져들긴 마찬가지였다. 약사회는 경실련 중재안을 파기하기 위해 약국폐문전략을 사용하다가 김희중 회장 직무대행이 구속되는 사태를 겪었다.

◇ 한약사시험 응시자격 놓고 다시 충돌

한약조제시험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보건복지부는 5.16 조치니 8.30 조치니 해서 정부내 한의약 전담부서의 설치 등을 약속하였으나 약대 6년제와 패키지로 제시되거나 한약학과의 설립 대학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아 한의계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물론 이때 발표된 정부의 조치로 인해 정부내 한의약 전담부서가 국급으로 격상되는 성과도 있었다.

한약학과의 첫 졸업생이 배출될 시점에 이르자 이번에는 한약사시험 응시자격을 놓고 한의계와 양약계가 격돌하였다. 약사법에 95학점이상을 이수한 약대생 95학번과 96학번은 한약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고 규정함에 따라 95학점 이수 인정 여부를 놓고 신경전을 벌여 응시자격을 가진 양약대생의 숫자를 100명선으로 축소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응시자격을 가진 양약학과 졸업생을 줄일 수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양약사 출신자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한약학과 자체가 양약대내에 있어 학문적 정체성이 모호해 늘 통합약사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분쟁이 조정되는 과정에서 양약사의 한약취급 자격을 제한해 놓기는 했으나 지극히 의례적인 법률 손질에 그쳐 국민건강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는 데 한계를 노출했다.

아무튼 한약분쟁사는 한편에서 삭발과 단식농성, 학생들의 유급을 불사한 희생이 뒤따랐고, 공식테이블에서는 한의계와 양약계, 정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해 치열한 논리싸움과 밀고밀리는 협상이 동시에 진행된 한편의 대하드라마였다.

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한의약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봐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김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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