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재정보] 다시 생각하는 본초②-附子와 賜藥(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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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재정보] 다시 생각하는 본초②-附子와 賜藥(上)
  • 승인 2003.07.1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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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재배종은 사천부자와 꽃부자 뿐


강병수(동국대 한의대 교수)


우리나라에는 附子가 자생하지 않는다. 다만 근연식물인 草烏라는 식물이 야생으로 여러 종 서식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미나리아재비과의 烏頭를 재배하여 側根을 약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A. chinenis와 A. fauriei도 같이 사용하고 있다.

A. carmichaeli Debx와 A. chinenis는 사천부자(四川附子)라고 하여 이것을 천오두(川烏頭)라고 하고 그 외에 것을 초오두(草烏頭)라고 한다.

우리나라 전근대 한의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자는 전량 중국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하여 왔으나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자의 사용이 대중화되지는 않은 것 같다.

부자가 문헌상으로 처음 기록된 것은 1406년 (태종 6년) 12월 22일 조연내사(朝延內使) 한첩목아(韓帖木兒) 양녕(楊寧) 등이 조정에서 명나라에 銅佛을 보낸 답례품으로 18가지 약재를 갖고 왔는데 그중에 부자가 들어있었으며, 1423년(세종 5년) 10월 15일 일본 九州多主德雄이 여러가지 물건을 조정에 헌납하였는데 그중에 부자 3근이 들어있었다.

이런 기록내용으로 보아 조선조 초기에는 궁중이나 상류계급에만 일부 공급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1433년(세종15년)에 편집된 鄕藥集成方 본초편에는 부자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명과의 인사교류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다른 한약재들과 같이 부자의 수급이 활발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 결과 1611년에 출간된 東醫寶鑑 본초편에는 부자에 대한 기록은 물론 임상응용에 사용한 처방이 많이 기록되어있다.

일제시대에는 현재의 서울 을지로 입구와 2가 사이를 황금정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은 고종 때까지 일반 민중을 치료하던 惠民署가 있었고 내의원에 근무하던 의원이나 왕가 후예들이 모여 한의원이나 한약방이 성업을 이루었던 지역이다.

이러한 시대에 경북 연일군 동해면에 이규준(李圭晙)(1923년 생 69세 졸)이란 儒醫가 출현하여 중국의 金元時代의 사대가인 朱丹溪가 인간은 陽常有餘와 陰常不足하여 滋陰降火法을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설에 대응하여 사람은 陽常患不足이요 陰常患有餘함으로 인간은 유아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陽氣가 부족하므로 助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여 인삼과 부자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이부자(李附子)란 별명이 붙었고 근세에 한방계에 유파를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함으로써 부자의 사용이 많아졌다고 생각된다.

최근세에 와서 제약계가 한약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본에서 독성을 제거한 부자를 수입하여 여러 가지 傷寒論 처방에 의거한 한방제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특히 종묘상들에 의하여 일본인이 부자의 꽃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품종을 개량한 꽃부자를 수입하여 희귀하게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근래 우리나라 생약학계의 선구자였던 고 韓大錫 교수님이 약사들의 모임인 한약연구회를 이끌고 1993년 7월 10일 중국에 학술대회 참가 겸 한약시장, 재배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나라 약초재배의 선구자였던 충남태안에 살고 있는 金和洙옹이 같이 따라갔다가 사천근교에 부자 재배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김옹은 우리나라가 조선시대 500년간 중국에서 부자를 수입하여 사용하여 왔으나 그 산지의 재배를 보지도 못했고 또 종자를 구입하여 심어보지도 못한 한을 풀고자 부자 산지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 다음날 가이드 한 사람을 대동하고 부자 산지인 江油에 찾아가 산지를 돌아보고 부자 3근을 사가지고 어렵게 중국공항을 통과하여 국내에 반입하였으나 부자의 성질이 덥고 특히 무더운 여름 날씨에 절어 거의 썩은 부자를 두 분 교수님과 나누어 3곳에 심었으나 김옹이 심은 몇 그루만 새싹이 돋아나와 재배에 성공하여 정부산하 농업기술원이나 대학의 약초원에 분양하여 널리 전국적으로 四川부자가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부자에 대한 수익성이 높지 않아 농촌약초재배에는 거의 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부자는 언제부터인가 국가 반역죄나 중죄인에게 임금이 내리는 사약(賜藥)으로 썼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깊이 인식되어 있다.

또한 TV사극에서는 당파싸움에 밀린 중죄인에게 임금이 사약을 내려 그 약을 먹고 각혈을 하면서 죽는 장면이 충격적으로 묘사되어 인식이 매우 좋지 않다.

그러나 실제 朝鮮王朝實錄이나 韓國醫學文化大年表 기록에는 부자를 사약으로 쓴 내용이 없다.

S대 어느 약학자가 사약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규장각 고서를 다 뒤져봐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본인이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자료실이나 국사전공 교수들에게 자문을 해도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내의원에서 賜藥을 만들 때에는 전수되는 비법을 비밀리에 밀조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기록상으로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짐주(짐酒)라는 독주가 있는데 전설의 새인 毒鳥의 깃털을 넣어 담근 술을 사람에게 마시게 하여 독살시키는 사약으로 쓴 것으로 그 술 속에는 실제 어떤 약물을 넣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교정관 임재표씨의 사료에 의하면 조선시대 사약이란 왕족이나 사대부는 그들의 유교적 사회신분을 고려하여 絞殺이나 斬殺을 시키지 않고 사약을 마시게 하여 신체를 보존케 한다는 배려에서 금부도사 등을 시켜 사약을 받게 하는데 이때에 사약을 받는 자는 의관을 차려입고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하여 사배를 한 후 사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賜藥의 내용은 砒石을 태워 승화시켜 얻은 砒霜, 精鍊하지 않은 生金, 불에 대지 않은 생꿀(生淸), 부자와 초오의 구근, 해란(蟹卵) 등을 배합하여 조제하였다는 설이 전해질 뿐이다.

이 약 중에 생명을 독살시키는 약은 비상과 부자, 초오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砒霜이란 어떤 약인가. 한약에는 鷄冠花, 石雄黃이란 광물이 있다. 이 광물은 비소와 유황의 화합물이다.

이 광물을 특수 제작한 高爐 안에 넣고 태우면 분해되어 수중기와 같이 휘발성을 갖고 연기와 같이 올라가 천장에 달라붙은 가루를 모은 것이 砒霜이라고 하고 그 성분을 비소, 화학명이 亞砒酸(As2O3)이라고 한다.

한방에서는 소량을 다른 약에 배합하여 옹종이나 적취, 담병에 이용한 적이 있다. 현대에는 유리공업, 농약, 의약용으로 널리 쓰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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