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522) - 「儒胥必知」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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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522) - 「儒胥必知」②
  • 승인 2012.02.0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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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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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書에 적힌 서글픈 지식인의 고뇌

 

본서는 원래 본문이 상하 2권으로 구분되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현전본은 모두 1책으로 묶여져 있다. 전서의 체제는 목록과 범례, 이어서 본문에는 上言, 擊錚原情, 所志類, 單子類, 告目類, 文券類, 通文套로 나뉘어져 있고, 부록에는 吏讀彙編, 報狀式, 書目式, 重囚同推式, 決訟立案式, 買得斜出式, 移關下帖式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가운데 상언부터 문건류까지는 상권으로 표시되어 있고 이하 부록의 서목식 다음에 ‘儒胥必知終’이라 적혀 있고 이관하체식 다음에는 다시 ‘儒胥必知卷之全終’이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훗날 여러 차례에 걸쳐 내용을 증보하고 개편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체제가 상당 부분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판본 가운데 1844년(甲辰)에 간행했다고 하는 京板 방각본 ‘甲辰年孟春開刊 武橋新刊’본이 초간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여기서 武橋라는 지명은 지금의 무교동과 을지로입구 언저리로 여겨지는데, 조선시대에는 육조 관아에 약재를 대는 약재상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또 근세에 들어서서는 인쇄업이 흥성했던 곳으로 「醫宗損益」을 지은 惠庵 黃度淵 역시 이곳에서 의업을 펼쳤던 유서 깊은 곳이다.

나머지 刊記가 남아 있는 판본은 모두 完山(전주)에서 나온 完板本들이다. 또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4종 가량의 간행처가 알려지지 않은 이종 판본이 전해지고 있어 이 책이 널리 유통되었음을 말해 준다. 특히 1901(광무5)년에는 「방약합편」의 편저자 黃泌秀가 甲午改革 이후 변화된 문서형식에 맞추어 내용을 새로 개편하여 간행하는데, 서명을 「新式儒胥必知」라고 이름 붙였다. 현재는 전경목 교수가 연전에 펴낸 번역본이 시중에 유포되어 있으니 참조해 볼만하다.

조선후기 고문서 형식의 변화와 사례를 통해서 당시 사회의 변화된 면모와 생활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제 행정 등 다양한 사법처리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또 내용 가운데 예시된 구타나 상해에 관한 所志를 통해 법의학적 소견과 처리 절차를 알아볼 수 있고 이두로 적은 문서투와 한글표기를 대상으로 당대 국어 표기법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어 국어사 연구 측면에서도 가치가 크다.

실제 상해 사건의 경우 ‘毆打所志’라는 제목으로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청원자는 “……제가 모모라는 놈으로부터 받아야할 돈이 조금 있어 오늘 아침에 찾아가서 독촉하였더니 가타부타 한마디 말도 없이 저를 때리고 옷을 찢었으니, ……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이렇게 감히 법을 맡으신 部令께 우러러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관청에 잡아다가 까닭 없이 저를 구타한 죄를 먼저 다스리고 제가 마땅히 받아야할 돈을 독촉하여 받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처분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엄히 치죄할 것이니 붙잡아 올 것” 물론 가상의 상황이지만 이 책의 독자는 책 속의 내용 가운데 어느 한 경우에 해당하는 억울한 피해자의 신분일 것이고 그들에게 제시된 모범답안은 다음과 같이 청원하면 시원하게 즉결 처분이 내려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준다.

중인과 서리들은 완고한 신분질서 속에서 비록 온전한 계급평등을 이루어내진 못했으나 실용지식을 착실히 쌓아나감으로써 양반이나 권력의 독점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文券類에 보면 奴婢文券이라 하여 常人이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처를 노비로 팔면서 작성하는 自賣文券이 버젓이 올라 있어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예속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서글픈 현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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