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우리과학]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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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우리과학] 침
  • 승인 2003.04.2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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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도구로도 사용, 기원은 우리의 '폄석'
수술요법 장점 살려 한의치료영역 확대해야

"침으로 수술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곧이 들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의학의 외과영역으로 한 몫 톡톡히 해냈을 침 치료법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자극요법 정도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게다가 침술하면 당연히 중국의 화타를 연상하게 되고, 서양의학자들은 침술요법을 대체의학의 한 분야로 분류하면서 침의 신비를 밝혀내려 오히려 몸이 달아 있다.

침구요법은 음양오행설, 장상학설, 경락학설 등 한의학의 기본이론을 근거로 체표상의 일정한 부위에 각종 침구와 조작 방법을 운용하여 물리적 자극을 줌으로써 생체에 반응을 일으켜 질병을 예방·완화·치료하는 의료기술의 한 분야다.

내과·외과적 치료에 두루 활용
'황제내경' 영추편 제1권의 첫머리에 나오는 '九鍼十二原篇'에 의하면, 침의 종류로 鍼·員鍼·鍼·鋒鍼·鍼·員利鍼·毫鍼·長鍼·大鍼의 9가지를 들어 각각 해설하고 있다.<표 참조>

이들 대부분은 현대의 것과는 다르고, 瀉血·排膿·切開 등도 행했기 때문에 후세에 와서 이른바 三稜鍼이라고 불린 봉침이나 피침과 같은 일종의 외과용구로 해석되는 침도 포함되어 있다.

소아나 과민 또는 체질이 허약한 사람인 경우는 침의 선단이나 측면을 피부에 가볍게 대고 문대거나, 롤러침을 사용하여 굴리는 방법도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침을 '소아침'이라고 한다.

그밖에도 치침한 침의 침병에 쑥을 붙이고 태움으로써 침체를 가열하는 '灸頭鍼'이라는 것도 있다. 또 종두침이라 하여 천연두에 걸리지 않도록 미리 예방접종을 할 때 쓰던 칼 모양의 침이 있었다. 천연두를 앓고 있는 소의 고름인 痘苗를 채취하여 유리에 홈이 파인 두묘판에 담아 종두침으로 어깨 발바닥 등에 상처를 내고 두묘를 발라 예방하던 도구이다. 이는 마치 참침처럼 쇠로 납작하고 날카롭게 만들어졌다.

침을 놓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의 수법이 있다. 얕게 또는 깊이 자입하거나, 자입한 채 일정시간 방치하는 置鍼法, 침병을 손끝으로 튕겨 침체를 가늘게 진동시킨다든지, 침을 올렸다 내렸다 하거나 자입 각도를 바꾸는 등 목적에 따라 여러 방법이 쓰인다.

석기시대 폄석요법이 기원
그렇다면 침의 기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 민족은 석기시대의 '石'과 고조선시대의 쑥뜸에 이르기까지 침, 뜸을 개발하여 발전시켜왔다. 그리하여 '一鍼, 二灸, 三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침구는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특히 석기시대의 폄석요법은 우리 조상들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치료법으로 침의 기원으로 평가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인 '소문'에는 중의학이 동서남북 여러 지역의 우수한 성과에 의하여 형성·발전된 사실을 기록해 놓고 있다.

"동쪽 지역은 하늘과 땅이 시작되는 곳으로 물고기와 소금이 많으며 바닷가에 있다. 그곳 사람들은 물고기를 먹고 짠 것을 좋아하며 한 자리에 편안히 있으며 음식 치장을 한다. 물고기는 사람의 속을 달게 하고 소금은 억제한다. 결국에 병은 癰疽가 되는데, 치료에는 폄석이 좋다. 그러므로 폄석은 東方에서 온 것이다"

여기서 폄석요법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폄석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아무 돌이나 갈아서 만든 것이 아닌 바늘과 같이 예리하게 버틸 수 있는 특수한 세기와 재질이 요구된다.

'山海經'의 저자가 고조선의 산 위에 폄석이 많다는 것을 강조한 것은 폄석의 산지를 밝힌 것인 동시에 이 시기에 고조선의 폄석 제작기술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진 사실을 뒷받침 한다.

壬亂 후 군진의학으로 활용
물론 철기문명의 광범위한 보급 이후 폄석은 금침으로 교체되었으나, 폄석의 치료방법은 그대로 전해졌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금속침의 기원을 중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경향이 짙지만, 원광대 한의대 정우열 교수는 금속침의 기원도 한반도의 철기문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지리적으로 지금은 중국 영토권에 속해 있는 땅들이 고대에는 우리 한민족의 생활터전이었음을 들었다.

이와 함께 정우열 교수는 "고구려의 한 의사가 중국 위나라에 가서 침을 놓았는데, 한치 되는 머리카락을 10개로 동강을 내고 침으로 꿰뚫어 보고 머리털 안이 비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들어 이는 우리 조상들의 침 놓는 실력이 비범했던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침의 발달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쇠퇴기에 이르게 되고, 내과와 외과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 이후에 침구학이 다시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전시에 군진의학으로서의 빠른 치료효과를 보였고, 왕실과 민간에 이르기까지 흥행하여 실용적 가치를 더하게 된다.

특히 한국의 침구학 중 중국이나 일본에 없는 독창적인 침법으로 침에 체질이론을 결합한 '태극침법', '팔체질침법' 등이 있다.

하지만 일제시대 한의사는 의생으로 격하되었고, 안마사, 침구사 등 유사의료업자가 양성되어 침구학의 학술적 제도적 발전을 크게 가로막았다.

世宗때 침구전문의 등장
침구학회 서정철 총무는 "분과의로서 침구의는 우리나라 침구학사에서 조선의 세종 이후에 생겼으며, 이는 현재의 한방전문의에 대한 역사적 뒷받침이 된다"고 그의 논문을 통해 밝혔다.

경희대 한의대 한방재활의학과 이종수 교수는 "옛 선현들이 침으로 수술을 해 왔듯이 이러한 훌륭한 치료법들을 사장시키지 말고 한의학의 수술요법으로 정착시키고 한의학 치료영역을 확대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한의학에서 침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데 비해 현재까지 침구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또 침구는 경락이론이 뒷받침되고 있으며, 이 경락의 임상적 의의를 해명하는 일이 침구의 과학성을 실증하는 불가결한 문제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침구학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침구학 자체의 장점 때문이며 이러한 장점을 찾아내 서양의학을 보완한다면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새로운 의학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예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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