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70)濟嬰新編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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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70)濟嬰新編②
  • 승인 2010.12.0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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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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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國牛痘 전래의 시말

 

「제영신편」 下卷

 

본문의 論牛痘來歷에서는 우두법 개발의 시말과 전모가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먼저 中華論이란 항목에서는 주로 「萬國公報」 등 중국 언론과 전문의서를 통해 알려진 우두법의 확산과정과 시술상의 우여곡절을 피력해 놓았다. 뒷부분에는 ‘東國論’이란 항목을 두어 우리나라에서의 우두 도입과정과 전파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또 지석영이 일본인 의사에게 우두법을 배워오게 되는 과정이 당시 수신사로 갔던 道園 金宏集의 말을 통해 인용되어 있는데, 대개 이것은 지석영이 펴낸 「牛痘新說」의 서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이어 汀 李道宰(당시 侍郞)와 松村 池錫永이 쓴 서문의 내용에서 발췌하여 기록하였다.

池錫永이 일본으로부터 우두접종법을 도입하고 종두의서 「牛痘新說」을 펴내는 과정은 일찍이 오래 전에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제9회 세월 속에 묻혀진 우두보급의 역사 - 「牛痘新編」 / 1999년 8월 30일자) 다른 한편 이 책의 저자 李在夏는 자서에서 “…내가 일찍이 을해년(1875)에 浿(해주)에 놀러갔다가 桂得河와 더불어 어울렸는데 …” 운운하여 그가 이 때 비로소 이국인을 통해 처음 우두종법의 효용을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그는 또 “지석영은 일본인에게 배우고 崔昌鎭은 중국인에게 배워왔으니 모두가 다 이 방법(우두법)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언급을 미루어 보아 당시 우두법이 중국과 일본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도입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지석영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몇몇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도입하여 여러 지역에서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기존의 학설에서는 18세기 말 박제가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인두법이 전해지고, 1830년대에 이루러 우두법이 알려졌다고 한다. 다만 인두법에 따른 접종은 많은 한의들이 실시하였으나, 우두법에 따른 접종은 그 뒤로도 실시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한때 정약용이 우두법에 따라 종두를 접종했다는 설이 퍼지기도 했으나,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못하였다. 현재까지 최초의 우두 접종자로 지석영,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한의사이며, 특히 지석영과 이재하가 유력시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문제의 초점은 이러한 우두 종법이 신의학을 공부한 양의사들에 의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방법으로 두창을 치료하고 인두종법을 적용해 오던 한의들에 의해 적극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우두접종의 이치와 면역발현의 이론도 역시 기존의 한의설에 의거하여 설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우두법이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 가장 먼저 적용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선 명료하게 단언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초보다는 빠른시간 안에 전국적으로 보급하는데 주력하고자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지역을 선택해 시도했기 때문이리라. 이에 비해 인두법은 우두법이 들어오기에 앞서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 1886년 알렌이 남긴 기록에는 서울 거주민 100명 가운데 60~70명이 인두법에 따른 종두시술을 받았다고 한다. 우두법이 1879년에 들어왔지만 인두법에 비해 널리 퍼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재하는 또 이 책을 펴낸 1889년(고종 26)에 「慈航」이라는 서명의 醫書를 지었다. 6권6책의 필사본인 이 책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하여 7言으로 그 대강을 말하고, 병증에 대한 원리와 脈法 및 치방과 약명을 적어 설명하였다고 한다. 이제하든 지석영이든 고루한 기존지식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치료기술을 도입하여 한의학적으로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적용하고자 노력했던 한의계의 선각자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전통의학정보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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