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69) - 濟嬰新編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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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69) - 濟嬰新編①
  • 승인 2010.12.0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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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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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痘接種法의 도입과 전파

『제영신편』에 실려 있는 施種圖

池錫永이 조선에 우두접종법을 도입하고 최초로 이 방법을 기록한 「牛痘新說」을 펴낸 것은 고종22년(1885)의 일이다. 그러나 그는 1887년 우두시술을 빙자하여 개화당 朴泳孝와 함께 徒黨을 끌어모았다는 혐의를 받아 康津의 薪智島에 유배되고 圍籬安置되었다. 그는 5년 후인 고종 29년에 이르러서야 혐의가 풀려 서울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책은 그 사이인 1889년 봄에 간행된 것이다.

책에 실려 있는 내용은 대개 지석영의 것을 많은 부분 답습하였으나 전래경위는 분명 다르게 설명하고 있어 당시 우두시술과 개화당의 정치적인 입지와 연계하여 무언가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하튼 이 책은 ‘皇上卽祚二十六年己丑’ 즉 1889년 5월에 嶺營(대구)에 牛痘局을 설립하고 거기서 새로 간행한 것이니 뒤이어 光武 6년(1902)에 內部衛生局에서 펴낸 「濟新論」과 함께 관부에서 공식으로 펴낸 두창서인 셈이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경위는 권두에 실려 있는 姜海遠의 서에 밝혀져 있는데, “…己丑年에 友人 錦石(이제하의 자)이 南州敎授로 있으면서 「濟(신편)」한 책을 초잡아 나에게 보여주며 교정해 주길 청했다.…” 이어지는 姜永老의 서문에는 우두법의 전래에 대해 “…고종조에 구라파와 교섭하여 여러 분야에 걸쳐 通商의 이득을 거두었다. 이 우두서가 도입된 지 몇 년이 흘러 소에게 시술했다가 사람에게 옮겼더니 할 때마다 속효가 나서 몹시 신기하다.”고 기술하였다.

또 이 책의 집필과정에 대하여 “올봄 나와 뜻을 같이한 錦石이 嶠南(대구)에 내려와 公局(우두국)을 설립하고 뛰어난 재주로 기술을 널리 베풀고자 하여 여러 가지 학설을 수집하고 한편으로 묶어 펴내니…”라고 하여 저자가 대구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접종술의 교육과 보급을 위하여 이 책을 집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앞서 나온 것처럼 강영노, 강해원, 조인하 등과 함께 대구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널리 종두법을 베풀고자 수강생을 불러 모으는 한편 여러 가지 학설을 수집하고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2편으로 꾸몄으니 선배들이 경험한 처방과 오늘날 시술한 용법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체 책 내용은 상하 2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권 첫머리에는 영국인 德貞이 전한 ‘牛痘考’가 실려 있는데, 동서고금 두창의 시작과 전파과정, 그리고 영국명의 占那(젠너)씨가 우두종법을 창안하여 각국 만인을 구제하게 된 내력이 소상히 기술되어 있다. 또 인두법에 비해 성공률이 떨어지는 우두법을 쓰게 된 까닭은 사람간의 접종이 거듭 될수록 독기가 맹렬해져 전염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種痘論은 영국의 의사 홉슨[Hobson, 合信]이 지은 것으로 종두에는 新舊 2가지 방법이 있는데 구법은 경증의 두창 환자의 痂皮를 콧속에 넣어 두는 것으로 苗痘法이라고 부른다. 접종하여 스스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가볍게 지나가게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어 나타나는 경우에는 오히려 치상시키는 경우가 많아 우두만 같지 않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논의는 홉슨이 지은 여러 의서의 내용 가운데 漢譯된 「婦新說」(388회 運命을 뒤바꾼 土耳其 牛痘法-2008년 9월 29일자 참조)을 통해서 얻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상권의 내용이 끝나는 권말에는 兒施種圖와 犢牛施種圖, 그리고 우두 접종에 쓰이는 여러 가지 의료기구들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본격적인 우두접종법은 하권에 이르러서야 시작되니 상권의 내용은 거의가 우두접종법이 전해진 내력에 할애된 셈이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전통의학정보연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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