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9) | 문치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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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39) | 문치국가 조선의 의료문화제도 ⑤
  • 승인 2010.12.0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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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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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의 지방관 부임, 정치적 위력까지 발휘

내 아픈 병을 치료해준 의사는 경력이나 인격에 무관하게 ‘생명의 은인’처럼 여기고 우대하고픈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혹 치료받은 사람이 당대의 실력자라면 상대적으로 많은 명예와 부의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

조선시대 내의원의 의사들은 영의정과 승정원 승지 등 국왕의 측근들을 직속상관으로 두었고, 국왕과 대면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품계의 상승이나 물질적인 혜택 등이 많았다. 다른 전문직 관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후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 중에서 수령직을 받아 지방으로 파견된 사람도 많은데, 허준은 양주목사를 지냈고, 양예수는 양천현감과 병마절도사까지 지냈다. 허임은 영평현령에서 부평부사로 영전하기까지 한다. 지금으로 보자면 낙하산식 인사의 전형인 셈이다. 지방사정도 모르고 관료로서의 자질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에게 국왕이 고을수령 자리를 마구 나눠준 것, 조선왕실의 탁상공론과 무능함의 표적이 되기에 충분한 일이다.

또한 이들의 부임지가 도성주변 경기지역 일대에 집중되었다면 그 비난의 강도는 더 높아진다. 한 연구자는 조선후기 내의원연구를 통해 이들의 부임지는 高陽(지금의 사대문외곽)이 가장 많고, 과천(果川), 금천(衿川-지금의 구로시흥 일대), 적성(積城-지금의 파주), 양천(陽川-지금의 강서양천 일대), 김포(金浦) 순이다. 조선후기 이들이 파견된 고을의 평균거리는 약 50km정도이며, 이들이 경기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이유는 왕실에서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쉽게 불러 쓰기 위함이라고 연구자는 설명하고 있다.[이규근, 조선후기내의원연구] 예전에 본 드라마 중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전염병이 극심한 지역에 파견된 의사가 기지를 발휘해서 약재를 마대자루에 담아서 우물 속에 넣어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마시게 함으로써, 극적으로 전염병확산을 막아내는 장면이다. 전염병이 돌게 되면 그 지역은 일종의 패닉상태로 변한다. 전염병확산도 막아야하고, 병자치료도 해야 하고, 또 백성들이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하는 등 민관군 및 의료진의 적절한 대책, 특히 임기응변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서 전염병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명의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한 고을의 책임자쯤 되는 사람이 의학에 정통하고 또 그런 기지를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면,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든든하지 않았을까? 혹시 도성주변의 지방관을 의료인들로 채워간 이면에는 그런 다중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방 각도의 육군을 통솔하는 병마절도사, 국방 외에 도적방비, 내란 진압책임까지도 가졌던 종2품의 군부 고위직에 내의원출신 양예수의 부임사실, 효종 때 수의(首醫)를 지냈으면서도 1676년부터 도성주변 10곳 이상을 돌면서 25년간 지방관을 했던 최성임(崔聖任)의 이력은 의료인의 지방관부임이 단순한 자리 나눠주기를 넘어선, 치료행위가 정치적 위력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새로운 역사인식의 가능성마저도 엿보게 한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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