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4) | 단계학파와 한국한의학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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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34) | 단계학파와 한국한의학⑤
  • 승인 2010.10.2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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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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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단계가 바라본 인간과 의학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온보학파의 바탕은 ‘反丹溪’이다. 다소 과격한 온보학자 조헌가는 주단계에 대해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외과의사 말로는 수술 테크닉은 외국에 가도 배울 게 없다고 한다. 서양의학이 미국에서 주로 들여온 것이지만, 이제는 미국 수준에 손색 없는 단계로 발전했고, 기계나 도구, 약품 몇 가지 등에서 아직 인프라가 미치지 못하는 정도라는 게 그의 요지였다. 우리나라의 서양식 의료는 이미 스스로 기술과 방법을 재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춘 지 오래 되었고, 그 수준이 이미 원래 그것을 시작한 곳과 견주어도 차이가 없어진 셈이다.

<동의보감>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하는 학자들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하나의 우수한 처방집이 만들어진 것보다는, 간행을 계기로 조선의학계가 중국의학에 맹목적으로 기대지 않아도 될 만큼 내공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 신기한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과 베트남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변화를 경험한다.

2010년 6월 일본 茨城大學에서 열린 동아시아의학사학술대회는 중국의학의 영향을 주변 국가들이 어떻게 주고 받았는지에 대한 담론을 정리하는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東醫寶鑑>(1610)이 일본에서는 <啓迪集>(1574)이 베트남에서는 <醫宗心領>(1766?)이라는 의서의 간행을 계기로 각국 전통의학의 정체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보편적인 세계화에 동참하면서도 자국민을 위한 특수성을 살려갈 수 있는 의료의 자주권을 획득했음을 뜻한다.

한자문화권의 모범국가였던 3국이 자국의 의료수준을 스스로 재생산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올리는데 기여한 중국 의서는 <의학정전>, <의학입문>, <만병회춘> 등이며, 이 책들 중 대다수는 주단계의 제자들이 200년에 걸쳐 정리한 중국의학의 정수들이다. 이미 주단계식 인간관에 익숙해 있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그의 제자들이 정리한 의학체제가 자국의 의학체계의 저변에 깔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은 전연 없었다.

물론 의료라는 것은 치료기술이며 사상적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주단계가 의학이 유학에서 나왔다고 강변해도 의학은 의학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서 <의림촬요>, <동의보감>, <방약합편> 등에서 주자학적 혹은 주단계적 요소를 강하게 느끼지 못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현재 동아시아의학에서 쓰는 용어 형태나 개념이 <의학입문>, <경악전서> 같은 명대 말기의 종합 의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면에 담긴 주단계의 영향력에 대해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단계는 <황제내경>에서 말한 마음을 주자학의 마음으로 설명함으로써, 일반 지식인들의 지지를 획득했고, 그의 제자들은 의학계 흐름을 리드해갈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丹溪’는 근 200년 간 동아시아의학의 트렌드를 주도한 핵심 키워드였다. 물론 그가 바라본 인간과 의학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이후 등장한 온보학파의 태생은 ‘反丹溪’적인 성격에서 출발했다. 다소 과격한 온보학자 조헌가는 주단계에 대해 극언도 서슴지 않았고, 온보학파의 명문과 삼초에 대한 치밀한 고증은 주단계의 ‘相火妄動’이라는 논리를 깨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만큼 주단계의 영향력은 강했다. 우리 한의학이 스스로 재생산의 기반을 갖춘 시기에 받아들인 중국의학이 그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사실은 필자가 한국한의학과 단계학파의 연관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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