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세 전국체전(국궁) 최고령 선수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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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세 전국체전(국궁) 최고령 선수 출전
  • 승인 2010.10.0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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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규

황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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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한의계 열전(3)- 황원엽 박천래 등
71세 전국체전(국궁) 최고령 선수 출전
부산지역 극빈자 무료 약제치료 실천

제주특별자치도 한의계 열전(3)- 황원엽 박천래 등 

“최제두는 갱신기간을 놓쳐 의생면허를 2개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는 <한의사>로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초창기 한의사제도에 이바지한 분들도 모두 제주도 외의 서울, 경남, 전남 등으로 옮겨서 개원한 것도 이런 사건들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주도민으로 4.3사건 그리고 부산의 미군정 시대 의료인 개설 혜택으로 부산으로 가서 의료활동을 하였던 분이 있는데, 1952년 제1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제주도민으로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신 분은 부산시 한의사회 부회장 고태박(한의사면허 : 125번 / 1910~1974)이 있다.

그는 동의전문학원 강사였으며 濟州人으로 51년 <생리학>을 ‘총론’ ‘각론’으로 편술하였고, <학낭결>에 경험방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제1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부산 경남 분리 직전 경남한의사회 회장 박천래(한의사면허 : 126번: 갱신 10번 / 1916~2005)는 동양의학전문학원 강사(해부 및 생리학 담당)이며 부산 동성한의원/ 대동한의원 원장(대한한의사협회 52, 54, 55, 58, 59년 감사)을 지냈다.

그는 1962년 부산 경남이 분리되기 직전 회장으로서 부산지역 극빈자를 위한 무료진료(3,600여명)와 약제치료를 했으며 중환자의 경우 지속적인 치료를 하였다. 특히 초창기에 그는 ‘의사 국가고시’ 과목 합격자였는데 부인의 産痛으로 인해 의사시험을 다 치르지 못하였다. 그 당시 태어난 아드님은 현재 한양대 의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박천래.
54년에는 원익수(한의사면허 : 463번 / 1889년~?)가 서울에서 개원하였고 9회 한의사 국가고시에서 이세인, 황원엽, 김희식이 경희대 출신으로 정식으로 면허를 취득하였다. 故 황원엽과 원로로 활동하고 계신 김회식은 제주한의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강명남, 진태준, 김희식, 홍태호(한의사 면허 : 2231번 1909년생. 영생당 한의원)은 무의촌에 근무하는 국민의료법 제17조에 의해 지정 업무 종사자(동원 한의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강명남은 한지의사에서 86년 법령에 의해 의사가 되었다.

제주도 한의사회 초대 회장과 3대, 7대 회장을 역임한 황원엽 회장(1915년 생)은 1986년에 <동아일보>에 만 71세의 전국체전 최고령 선수로 화제를 받았는데 ‘6번째 체전 출전(국궁 부분)과 꿩 사냥에 관한 이야기’ 관련 기사가 1976년 <매일경제신문>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됐다.

“선각자들이 ‘제주 醫生會’를 창립했고, 1962년 좌임관 진태준 황원엽 강명남 4인이 결성해 제주도 한의사회를 재탄생시켰다”


■ 한의사 최제두와 현지준의 아들 서예가 소암 현중화= 과거 한의사들의 모습은 도지제나 혹은 서울에서 과거 대한한의사협회 소속의 의학강습소에서 학습을 통해 의생면허를 취득하였다. 제주도에서 처음 인화한의원(인화의원)을 개원하였고 초창기 부회장을 지냈던 장한규(의생 2812번 : 1880년~1942년)에 대해 일부에서는 ‘조선총독부 의원 소속 의학강습소’를 2년간 졸업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기록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전신의 출신자로는 김태민(1913년 졸업, 양의사 104번)이며 1915년 제주 최초로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관련 관보와 졸업생 명부에 장한규의 이름이 없고 한의사 단체의 잡지인 <조선의학계> 회원인 것으로 보아 典醫 서병효가 만든 ‘한성의학강습소’ 혹은 다른 한의학 관련 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의 유명한 서예가인 현중화의 일화를 보면 의생 최제두(1897년 5월 23일~1957년 12월18일)의 집에서 고교시절 기거하며 부친 의생 현지준(1884년~1967년 : 의생, 면장)의 뜻에 따라 한학과 의생을 도지제 의학교육의 형태를 걷다가 서예가의 길로 간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최제두는 1950년대 제주도 내에서 한의사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며 한의사(의생 = 한지한의사 : 면허 160번)로 대한민국 정부에 등록되어 있다. 하지만 1957년 사망시 면허 말소로 ‘대한민국 정부 관보’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분은 특이하게 의생시절 면허 갱신일을 놓쳐서 의생 면허번호가 8439번과 9197번 2개를 가지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의사>로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제주도 한의사회를 구성할 때 몇 분이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최제두는 갱신기간을 놓쳐 의생면허를 2개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는 <한의사>로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제주지역에서 실존인물로 의녀 ‘대장금’의 장덕과 ‘거상 김만덕’은 TV를 통해 유명해졌는데 표선 제주민속촌에 관련 내용이 있다. 김만덕은 자선사업가로 정조 때 자선사업의 공로로 ‘차비대령행수의녀’, ‘약원 내의녀 행수’로 되었으며 그녀는 <조선왕조실록> <여유당전서> <정유각집> <추재집> <탐라기년>과 박지원, 박제가의 기록내용 그리고 그녀를 기리며 ‘모충사’와 ‘만덕기념사업회’, ‘만덕상’ 등이 있다.

수월봉 좌임관 선생 비석 아래서 관광객이 제주 풍광을 감상하고 있다.
제주도의 경우 조선시대부터 전라남도 제주목으로 일제시대에도 전라남도에 속해 있던 특이한 지역적 구분이 있었다. 또한 선각자들이 현재의 지부 한의사회에 해당하는 ‘제주 醫生會’를 창립하여 동아일보에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1923년에 제주한의사회는 시작되었다. 30년대 15~20명으로 한의사회를 유지하였는데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라 의생들은 ‘한지 한의사’로 재탄생하고 새로운 한의사 국가시험에 응시하여 한의사들이 새롭게 탄생하였다. 이런 한의사들의 모임은 1962년 5월14일 좌임관(의생 출신 한의사), 진태준, 황원엽, 강명남 4인이 결성하여 제주특별자치도 한의사회를 재탄생시켰다.

■ 1960년대 제주특별자치도 한의사회= 1961년에는 진태준(1925년생) 도회장이 면허를 취득하였다. 1963년에 홍태호와 강명남이 합격하였으며 67년에 이창홍이 이후에 강대교가 70년대는 장양홍, 문종훈, 김두현이 제주도 출신으로 합격하였다. 60년대 동원 한의사로 한지의사 응시자격을 받으신 분 중에서는 33.11% 정도만이 한지의사 면허에 합격하였는데 71년 양의사 면허등록자로는 남원의 강명남(한지의사 753번)과 진태준(한지의사 808번)이 있다.

■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한의사 좌임관= 제주도 고산기상대의 수월봉 정상의 길 아래에 ‘진태준 謹竪’라는 비석을 보고 낯익은 이름이라 내려가서 어떤 비석인지? 앞쪽을 보니 ‘한의사 좌임관 선생 기념비’라고 적혀 있었다. 진태준 선생이 지은 <제주도 민간요법>에 좌임관 傳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淸州 左氏 入島始祖 亨蘇로부터 15世이며 1889년 11월24일 左時道의 아들로 태어나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의사(의생:한지) 면허를 가지고 계시며 三省한의원(한의사제도의 창립과 더불어 의생을 한의사로 의생이 운영하는 의원을 한의원으로 개칭)을 개원하신 분으로 방약합편의 약성을 외우고 ‘일제시대에 의생은 침, 한약, 수술, 주사 등을 한다’는 당시 규정에 의해 진료를 하였다. 특히 그는 늑막염, 간옹, 복막염에 楡皮와 3%의 석탄산수로 드레싱을 하는 방법이 의안으로 나와 있다. <계속>

황연규/ 마산 성신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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