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1) | 단계학파와 한국한의학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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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31) | 단계학파와 한국한의학②
  • 승인 2010.10.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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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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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를 통한 지식의 공유는 주자학 세계를 더욱 공고히 다져줬고, 불교와 도교는 그 새로운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만약에 서울의 광화문에서 시작해서 아래로는 남대문 동서로는 동대문과 서대문 안이 조선시대전통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지금의 빌딩숲은 그 외곽에 자리잡고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프랑스 파리와 체코 프라하에 버금가는, 자금성과 만리장성에 못지않은 아시아의 명소가 되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가을에 은행단풍이라도 들때면 그 넓은 지역에 까만 기와지붕과 노란은행잎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아마도 숨을 멎게했을지도 모른다.

불과 몇십년전의 일인데, 그때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답은 자명하다.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안했다. 서둘러 빈곤을 벗어나야했고, 그래서 서구문물을 상징하는 고층양옥에 매료되어버린 이상, 지겹도록 보아온 기와집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구시대의 상징이었고, 허물어버려야 대상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위정자나 국민이나 하나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빨리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을테지만, 그로 인해 서울의 중심을 아름다운 기와건물로 채울 수 있었던 가능성도 철저하게 사라졌다.

근대 서구문화가 놀라운 속도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대체해 갔던 것처럼, 천년전 쯤에 동아시아는 주자학이라고 불리우는 신학문과 신사상이 빠르게 불교를 대신해가고 있었다. 당시 불교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교경전은 더욱더 많아졌고 교리는 풍부해지고 정교해졌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을 더 이상 매료시키지 못했던 것 뿐이다. 마치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아무 문제도 없고 그닥 불편하지 않지만,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대체되어가는 것처럼, 더 이상 불교는 신선한 것을 주지 못했으며, 오랜 기득권생활에 때론 정체되고 일부에서는 부패와 엉켜있는 경우도 많았다.

주자학을 했던 사람들은 주희(朱熹 1130~1200)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교와는 거리를 두었고, 도교하고도 결별하고 싶어했다. 현실과 무관한 내세를 향해가야 한다는 불교도 싫었고, 세상의 진리는 절대로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신비감을 증폭해가는 도교도 싫었다. 그야말로 신세대였던 그들은 새롭게 등장하는 인쇄문화-송대 이후에 조판술의 발달과 종이의 대량생산을 기화로 책이라는 매체가 보편화됨-를 효율적으로 이용했고 문자가 만들어낼 새로운 문명의 힘을 직시하고 있었다.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뿐 아니라, 문자를 이용해 우주만물에 대한 개념정의를 새롭게 하기 시작하였다.

문자를 통한 지식의 공유는 그들의 세계를 더욱더 공고히 만들어주었고, 글 이외의 다른 전달체계에 이미 익숙해져있던 불교와 도교는 그 새로운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다. 아마 구세대들은 문자로만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주자학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문화였고 그 흐름은 시험을 통해서만 관리를 뽑는 과거제도에 힘입어 엄청난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점차 ‘책’이라는 포터블한 매체를 통해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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