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150] 備豫百要方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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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150] 備豫百要方①
  • 승인 2003.04.1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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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고려의학의 혼

그림설명-『의방유취』 인용제서의 비예백요방

『備豫百要方』은 국내는 물론 동양의학계에서 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처방서로 다만 『醫方類聚』에서만 보인다.

『의방유취·인용제서』에서 고려 의서 『御醫撮要』 다음으로 수록된 이 책은 여러 문에 걸쳐 많은 분량의 내용이 채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책에 대한 서지 정보나 출간에 관한 사실 등 주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조선은 물론 중국의 史書나 서지 목록에서조차 전혀 언급되지 않은 이 미지의 의서는 이러한 이유로 그간 역대 학자들의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어 왔으며, 방대한 분량의 『의방유취』 안에 파묻혀 숨겨진 채로 기나긴 세월을 지내왔다.

몇 해 전 ‘의방유취의 데이터베이스 구축’ 연구를 진행하던 중 연구진은 『의방유취』의 병증 각문 여러 곳에 걸쳐 중요 인용서로 채록된 이 의서가 다름 아닌 삼국시기 이래 고려까지 전승된 우리 민족의 고유의학경험이 누적된 전통한의처방을 수록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되었다.

결국 끈질긴 노력 끝에 이 책이 순수 고려 의서임을 파악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국내외 학계에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자리에서는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어 뒤늦게나마 이 소중한 책이 고려의서임을 입증하는 과정을 간추려 보기로 한다.

이 생소한 이름의 의학서가 고려의학서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의방유취』권24, 중풍문 『비예백요방』의 諸風論에 나타난 ‘尙書金弁經驗’이라는 여섯 글자이다.

四肢연縮方 : 木果實搗碎, 以蒸甑之, 幷所蒸水, 置入沐, 勿令泄氣. 尙書金弁經驗.

金弁(1189~?)은 고려사에 기록된 역사인물로 金仁存, 金永錫으로 이어지는 고려말 손꼽히는 명문세족 강릉 김씨 가문의 인물이다.

특히 이름이 전하는 가장 오래 된 고려 의서인 『濟衆立效方』의 저자 김영석의 증손이라는 사실은 이 책이 고려의서일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고려 熙宗2年(1206)에 18세의 나이로 文科及第하여 高宗朝에 활약한 인물로 中書舍人(종4) 知制誥 등을 역임하고 判將作監事, 東北面兵馬使를 거쳐 1229년에 戶部尙書를 지낸 바 있다.

따라서 고려사와 족보에 기록된 사실과 서로 부합된다.

이에 관한 자료로 李奎報의 『東國李相國集』과 徐居正의 『東文選』에 ‘金弁讓中書舍人不允批答’이라는 기록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미심쩍어 보일 수도 있는 이 같은 결과는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단서를 통해 확증을 얻을 수 있다.

眼風赤澁痒方 : 楓葉不以多少, 右以水爛煎, 去滓, 停冷洗之, 不過兩三度差. 出愼尙書方.
(의방유취 / 권70 / 안문 / 비예백요방)

洗眼藥 처방의 말미에 기재된 주석의 출전 표기에 적힌 ‘愼尙書方’의 주인공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愼安之’로 여겨진다.

史傳에 “그는 원래 송나라 開封府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愼脩가 문종 때에 상선을 따라왔는데 학식이 있고 또 의술에 정통하였다.

신안지는 예종과 인종 두 왕을 섬겼는데 ……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兵部尙書三司使判閤門事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의술로 유명하고 漢語를 잘 알았으므로 南朝(송나라)와 北朝(요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작성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신상서방’은 송나라에서 도래한 고려 귀화인 신수로부터 병부상서 직을 거친 것이 확실한 신안지 집안의 의약경험을 담은 家傳方書로 보인다.

이들 두 가지 고려의약경험이 담긴 의학서가 채록된 『비예백요방』이 고려인의 손에 의해 편집된 의서일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다음 회에는 이 책의 저술시기와 전본, 수록내용의 성격에 대해 좀더 추적해 보기로 하자.

한국한의학연구원 안 상 우
(02)3442-1994[204]
answer@kiom.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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