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轉女爲男 진위 여부 큰 의미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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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轉女爲男 진위 여부 큰 의미 없어
  • 승인 2010.07.22 10:54
  • 댓글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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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영

안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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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해석 중요성‧ 다양한 관점 도출 ‘성과’
진위 여부 큰 의미 없어
원전 해석 중요성‧ 다양한 관점 도출 ‘성과’

轉女爲男 관련 논쟁을 보며

“필자는 이정우 원장과 김기왕 교수의 주장이 모두 맞다는 兩是論에 살짝 비판의 겉옷을 두른 양비론 입장이다” 

‘전녀위남’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이미 여남은 번 가까이 토론된 까닭에, 본 논쟁의 요지를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췌언(贅言)을 무릅쓰는 것은 필자가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장부학(丈夫學) 분야를 강의하는, 따라서 당연히 ‘전녀위남법’에 대해서도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이번 논쟁에 대해 뭔가 언급해야 하지 않느냐는 일말의 책임감 때문이다. 게다가 불과 보름여 전에는 남녀 성별의 결정에 관한 서양의학적 내용은 물론 한의학의 ‘변남녀법(辨男女法)’․‘전녀위남법’ 등도 망라한 ‘성’ 관련 졸저 <성학>까지 상재(上梓)했으니, 더욱 더 한마디 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밀려온 탓이다.

아무튼 본 논쟁에 대해 말하자면, 필자는 비겁하게도 양비론자(兩非論者)의 입장이다. 이정우 원장님과 김기왕 교수님의 주장이 모두 맞다는 양시론(兩是論)에 살짝 비판의 겉옷을 두른 양비론을 취하는 것이다. 본디 양비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토론만 죽이는 행위이기에 절대 피해야 하지만, 두 분의 견해를 곰곰 들여다 보노라면 양비론을 취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전혀 생뚱맞지만, 이 기회를 빌어 서양철학사를 일별하고 필자의 견해 혹은 바람을 피력하고자 한다.

이번 논쟁의 핵심은 ‘전녀위남법’의 진위(眞僞) 여부이다. <동의보감>, 아니 최초 <천금방>에 수록된 ‘전녀위남법’이라는 한의학적 이론 혹은 지식이 맞느냐 틀리냐는 것이다. 그런데 근원적으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론이나 지식, 아니 거창하게 진리(眞理)의 진위․가부․시비․참 거짓을 판단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아마 거의 대부분 이성에 바탕한 연역추론과 경험에 바탕한 귀납추론이라고 답할 것이다.

사실 수백 수천 년 전의 원전을 읽을 때도, 눈앞의 환자를 진료할 때도, 우리는 으레 머릿속으로 몇 번 헤아려보는 ‘이성’과,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온 바의 ‘경험’을 참고하지 않던가? 참된[眞] 이치[理], 곧 진리 판단의 두 가지 큰 축은 이성과 경험이며, 이런 까닭에 2,500여 년 이상 진리 추구에 골몰해온 서양철학사의 대강을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의학 전공자가 동양철학 놔두고 왜 서양철학을 들먹이느냐고 의문을 표할 수 있지만, 동양의 ‘도(道)’는 걸어가며[辵(辶)] 생각하는[首] 일상적 삶인 까닭에 이성․경험 등의 용어가 없지 않은가?

진리 탐색에 대한 서양철학사의 큰 흐름을 필자는 나름 5단계로 정리한다. 최초는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수립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론으로, BC 300여 년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다시피 진리 판단의 도구로 ‘삼단논법’을 사용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란 유명한 이야기! 어떤가? 논리적으로 한 점 모순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 연역론은 진리 판단 면에서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한다.

“진리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는 이성에 바탕한 연역추론과 경험에 바탕한 귀납추론이라고 대부분 답할 것이다”

공리(公理; 증명 없이 바른, 조건 없이 전제된,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는 전제가 참이면 결론 역시 항상 참이기 때문인데, 저명한 수학자 괴델(Gödel)은 1931년 “모든 공리계는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소위 ‘불완전성 정리(incompleteness theorem)’를 발표함으로써 진리 판단 도구로 이용되는 연역론의 근본적 한계를 증명했다.

그럼 논리적 비약이 있겠지만, 이를 ‘전녀위남법’에 대입해 보자. 이정우 원장님은 전녀위남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위기의 운행을 들었다. 하지만 위기의 운행이 공리라면, 아니 그 이전에 음양교맥의 흐름이, 아니 그보다 더 먼저 한의학의 근간인 음양오행이 증명될 수 없는 공리라면 남는 건 오로지 틀림없으리라 믿는 ‘믿음’뿐이다. 마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믿음)이 지식의 출발점이다”고 했고,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던 중세 1000년의 기간에는 무한회귀를 되풀이하는 신의 존재론적 증명만이 이루어졌듯이…. 한의학은 확실히 서양의학에 비해 연역론 위주이지 않은가?

중세 암흑기를 지나 인간의 이성이 눈뜨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는 베이컨․갈릴레이․데카르트 등으로 대표되는 철학자(과학자?) 그룹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금언(金言)으로도 유명한 베이컨은 “편견 없는 관찰과 귀납추론을 통해서만 지식 축적이 가능하다”고 주장했고, 갈릴레이는 “측정 가능한 것은 측정하라. 측정할 수 없다면 측정 가능하게 만들라”고 했으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며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절대적 자아로서의 인간을 확립했다. 모든 게 신학에 종속되어 설명되던 구습(舊習)을 벗고 인간이 진리 판단의 주체로 우뚝 서게 되면서 실험과 관찰을 통한 경험 중시의 근대과학이 시대를 지배하기 시작했는데, 16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서양의학은 주지하다시피 이 근대과학의 부산물이다.

아무튼 당시에 태동된 소위 ‘과학’에서 진리 판단의 도구로 귀납론을 적용하면, 개연성이 커지고 급기야는 거의 확실성에 도달한다. 누군가가 “나도 죽고, 너도 죽고, 모든 사람은 다 죽는 게야!”라고 말했을 때, 틀렸다고 부정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귀납법 역시 문제가 있다. 흔히 ‘러셀의 칠면조’로 인용되곤 하는데, 매일 주인에게 먹이를 맛있게 얻어 먹던 칠면조는 세상 끝날 때까지 그럴 줄 알았건만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주인 손에 잡혀 통구이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즉, 귀납론은 경험에 의거하는 모든 논의의 타당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는 경험에 의해 증명되지도 않는다.

“서양의학에서 밝혀 놓은 고환성 여성화 유전자 등과 같은 성의 결정 및 분화에 관한 복잡다단한 이론을 접하지 못했다면 전녀위남법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19세기의 니체는 “경험이나 귀납으로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한다. 논리적으로 단지 그래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고 회의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그런데도 요즘까지도 귀납론이 힘을 갖는 것은,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한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런 갈등 없이 쉽게 믿기 때문이다. 서양의학은 확실히 한의학에 비해 귀납론 위주이며, 대다수의 사람은 통계적 숫자놀음에 뛰어난 서양의학적 설명에 더 많은 신뢰를 보내지 않던가?

20세기 초에는 포퍼가 귀납 없이도 지식(과학)의 합리성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반증(反證; falsification)주의를 주창했다. 그는 “(과학) 지식은 추측과 반박을 통해 성장한다”며 참된 지식(≒진리)으로 인정받으려면 반대되는 증거를 견뎌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슐리크가 설립한 과학자․철학자․수학자 집단인 빈 학파도 1920년대에 포퍼와 거의 비슷한 ‘검증 가능성 원리(명제의 유의미성은 경험과 관찰에 의존하므로, 검증할 방법이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다)’를 제창하며 ‘논리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했으니, 그들은 지식․진술․명제의 참 혹은 거짓의 입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치중했다. 한 마디로 “의심 나면 실험해 보면 된다”는 말인데, 이를 전녀위남법에 적용하면 아무래도 아쉽지만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것 같다.

그런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등장했다. 그는 “(과학)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단지 패러다임의 산물일 뿐이다”고 파격적인 의견을 개진했는데, 과학사를 전공한 그가 제시한 대표적 예는 우리가 중․고교 시절 배웠던 역학(물리학?)의 변천사이다. 뉴턴에 의해 확립된 결정론적․기계론적 고전역학 법칙이 맥스웰․플랑크․아인슈타인․슈뢰딩거․하이젠베르그 등을 거치면서 무참히 어긋나더니, 근래 가장 정확하다고 인정되는 원자모형을 구축한 보어는 “우연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물리학 법칙의 일부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쿤의 주장처럼 진리가 단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신념과 가치체계이자 문제 해결방법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임이 분명하다. 다만 명심해야 할 점은 무엇이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설득 가능하면 진리이고, 설득 불가능하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전녀위남법에 대입하면, 이 또한 부정적인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의사들끼리도 잘 수긍하지 못하는 마당에 어찌 양의사를 설득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은 확실히 미국적인 발상인데, 퍼스와 로티의 실용주의적 진리관이다. 퍼스는 “지식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고 했고, 로티는 “진리란 발견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고 했으니, 이들의 견해는 ‘좋은 결과를 낳는 유용한 믿음이면 곧 진리’라는 말이다. 시시비비 가리느라 왈가왈부 하는 소모적 논쟁을 피하고 그저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데만 힘쓰자는 뜻인데, 과연 무엇이 좋은 결과인지는 또 다시 논란의 대상이다.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한 언 발에 오줌 누기일망정, 잠깐 동안의 한기 제거에는 일말의 도움이 되지 않던가?

“經典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경전은 교단에서 그 종교의 중심적 敎說을 기록한 책을 의미하며, 자칫하면 ‘경전 무오류설’ 즉 교조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

전녀위남법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겠노라 해놓고 엉뚱하게 서양철학사를 일천한 지식에 걸맞게 주마간산 격으로 늘어놓고 말았다. 하지만, 주장하고 싶은 바는 그런 대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무게 중심의 기울기는 필자 역시 김기왕 교수님 쪽인데,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단언해서는 안된다는 마음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필자도 장부학 강의를 준비하면서 근래 서양의학에서 밝혀 놓은 고환 결정 유전자․고환성 여성화 유전자 등과 같은 성의 결정 및 분화에 관한 복잡다단한 이론을 접하지 못했다면, 남녀의 성별 결정은 XX․XY 염색체가 결합하는 수정의 순간 이루어지므로 전녀위남법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여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에는 그토록 분명해 보이던 서양과학의 성 결정이론이 오히려 모호하다는 걸 확인한 만큼, 일부러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하며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한다. 비겁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필자의 캐릭터 자체가 무신론자보다는 불가지론자의 성향이니….

한편, 이정우 원장님의 한의학 이론의 진위 판단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전의 정확한 해석 및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적극 공감한다. <논어>의 첫 문장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時’를 ‘timely’로 해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often’으로 풀이한 역문(譯文)들 탓에 아직도 많은 사람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로 오독(誤讀)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한의사라면, ‘경전(經典)’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경전은 문자 그대로 종교 교단에서 그 종교의 중심적 교설(敎說)을 기록한 책을 의미하며, 자칫하면 ‘경전 무오류설’로 흐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짧은 소견으로 우리 스스로를 부정하는 우를 범해서도 안되겠지만, 마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경 무오류설’을 주장하듯 해서도 곤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전녀위남법의 진위 여부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비록 앞서 언급한 5가지 서양철학의 진리 판단 도구를 대입하면, 연역론으로는 단지 믿음에 기초한 것이고, 귀납론과 포퍼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부정적인 면이 훨씬 많으며, 쿤의 말을 빌리면 우리 한의사들이 모두 동의하는 패러다임이 아니고, 퍼스․로티의 실용주의에 입각하면 썩 좋은 결과를 도출하기 힘든 이론으로 여겨질지라도, 이번 논쟁을 통해 최소한 원전 해석의 중요성 및 관점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충분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이정우 원장님께서는 앞으로 되도록 모든 한의사가 수긍할 수 있는 패러다임에 입각한 비급(?!)을 적극 소개해 주셔서, 우리 모두 한의학의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론 유유히 역영을 펼치도록 해주옵소서!

안세영/ 경희대 한의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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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제가 2010-07-30 12:07:37
니다. 아마 의사님께서는 한의학적인 치료결과를 접해보셔서 한의학에 관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그런 지속적인 관심은 동서의학발전과 개인적으로는 환자들의 치료에 많은 발전을 끼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서양의학적인 관점으로 동양의학을 판단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수신제가 2010-07-30 11:35:56
한의학에 관심이 너무 많으신 거 같고 다른 양방의사분들과는 달리 열린 마음으로 한의학을 접근하시려고 하시는 것 같아서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은 생각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 자체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서양의학의 관점으로 동양의학을 이해하려고 하면 아마 많이 난감하고 허무맹랑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실 겁니다. 서양의학에서 氣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듯이 氣를 빼고는 한의학이 이야기 될 수 없습

청심 2010-07-28 11:40:35
세계의학으로 뻗어나갈 기반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위기행에 대한 이해로 그것은 현실화될 것입니다... 많은 한의사들이 위기의 운행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면 한의학은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실증적인 세계의학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의사님께 2010-07-27 16:15:56
한의사들 사이트라고 하시면 서운해 할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 한의사 그리고 한국 한의학을 아끼는 많은 사람 모두 서운해 할 겁니다. 이 사이트와 이 신문은 말도 안 통하고 같은말만 반복해대는 몇몇 시대착오 망상론자들의 자위행위 장소일 뿐입니다. 그렇게 이해해 주세요

의사 2010-07-27 16:05:10
뭐하는 짓인가 싶어 글 모두 지웠습니다. 답변해주시느라 수고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환자들에게 도움이되는 실증적인 한의학으로서 발전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점심시간에 회진끝나고 오락하는 개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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