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탕의학’ 편견 서양인들 전유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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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탕의학’ 편견 서양인들 전유물일까
  • 승인 2010.07.2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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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영

홍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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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상 최대의 쇼>
식민 의학사관 여전히 건재
‘재탕의학’ 편견 서양인들 전유물일까

<지상 최대의 쇼>  
리처드 도킨스 저, 김명남 옮김, 김영사 刊

의사학도로서 고민이 많다. 한국 한의학의 정체성을 추구하다 보면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서양의학의 대척점에 서 있지만 저울은 기울었다. 한의학의 독자성을 파고든 논문의 울림은 종이 밖을 벗어나지 못한다.

저자는 진화론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창조론자들과의 대립이 그만큼 고달프다는 뜻이리라. 진화론에 관해서라면 <야누스>나 <생물학이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판된 지 오래다. 600쪽이 넘는 이 책을 고른 것은 일종의 연대감 때문이다. “바쁘지만 않다면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로 무지하게 느껴지는 편견”에 맞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펜 끝이, 한의학을 올바로 규정하고자 하는 붓끝에도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잠깐 주저앉아 땅이라도 한 번 쳐보고 싶지만 갈 길이 바쁘다. 국제회의장에서 서양의 의사학자들을 만나면 한국 한의학이 그저 변방에서 재탕한 중의학에 불과하다는 편견을 매번 수정해 주어야 한다. 국내에서는 양의의 편견에 기반을 둔 일원화 논리의 積聚가 뱃속을 불편케 한다. 그나마 지금 수준만큼 챙기기에도 바빴던 그간의 현실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는 열심히 돌아간다.

진화는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인간과 쥐와 파리는 유사한 유전자를 공유하므로 모든 개체는 동일한 블록의 새로운 조합일 뿐이라는 이론이 향하는 곳은 결국 다문화주의나 세계화이다. 자본주의의 속성과도 일맥상통한다. 한의학의 세계화는 어떨까? 세계화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일부 전통의학 세계화론자들이 이상시하는 모델은 취사선택형이다. 이것은 전통의학 해체를 전제로 한다.

우리가 원하는 모델은 무엇인가. 현대화, 과학화, 세계화도 나름 필요하지만 우선은 정체성부터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는 학부에서 쌓아 올렸던 의사학 지식이 너무 단출하다. 향약집성방보다는 본초강목이 익숙하고, 허임의 침구경험방보다는 침구대성이 더 친근하다. 향약구급방을 읽고 콧방귀가 나올 수도 있다. 어쨌든 미키 사카에는 성공했다.

“동아시아 전통의학”에서 출발한 진화의 흐름에서 우리는 하나의 지류를 선택하여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가는 일을 반복해 왔다. 티벳의학, 베트남의학, 중의학, 일본의학, 인도의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양에서 한국의학사 관련 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는 연구자의 성과물을 보면, 아직도 미키 사카에의 <朝鮮醫學史及疾病史>는 聖書이다. “재탕의학”이라는 인식은 우리의 뇌리에도 깊이 박혀있다.

도킨스의 진화론 예찬이 멋있어서도 그의 현란한 글솜씨 때문도 아니다. 그의 부지런함을 배우고 싶을 뿐이다.

홍세영/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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