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의계 열전(2)- 박천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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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한의계 열전(2)- 박천래 등
  • 승인 2010.07.0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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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연규

황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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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한의사들 제주 이외 지역 개원
초창기 한의사들 제주 이외 지역 개원
4.3사건 현대사 아픔… 미군정 의료인 개설 여파

제주특별자치도 한의계 열전(2)- 좌임관 등  

“부상규는 ‘한라산 박사 부정휴(제주도 왕벚나무 관련)’의 부친으로 제주 세화교회의 설립에 남다른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 의생회 초창기 활동= 제주도 의생회에서 초창기 회원인 최치경, 김규배, 장한규, 김의정, 강기조의 활동을 살펴보면 최치경과 장한규 등은 제주한의사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김규배는 1914년 <全 조선의생회> 회원으로 일제의 강압으로 의생으로 격하되었을 때 서울대회에 참석하고 활동을 하였다.

1916년에 발간된 한의사협회 전신 잡지 <동서의학보>에는 김의정이 있는데 당시 제주한의사회 원로로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최병룡과 현지준이 <조선의학계> 회원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조선의학계는 1918년에 한의사협회의 일제시대 활동이 기록된 잡지이다. 1919년 <조선의학계>에는 고용식이 포함되어 있다. 1920년대에는 1924년에 <동서의학연구회 월보>에 고지규와 박맹호가 실렸는데 한의사회 일원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 시기에 한의사 면허를 취득한 부상규는 ‘한라산 박사 부정휴(제주도 왕벚나무 관련)’의 부친으로 제주 세화교회의 설립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한반도와 떨어져 있고 일본군의 주둔지로서 지정학적 특징을 가진 제주는 의생(한의사)이 양의사가 많이 되었는데 면허번호가 7187번인 김봉현은 원래 황해도가 고향인데 제주도 구좌에서 1942년 한지의업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면허번호가 8440인 김시탁도 1936년 한지의업 면허를 취득하였다. 또한 김덕환도 8775번의 의생인데 1937년 한지의업 면허를 받고 이후 양의사로 되었으며 초기 한의사회 간부인 변태우도 한지의업 면허를 취득하여 해방 후 전라도에서 양의사로 보건소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김규배는 1914년 <全 조선의생회> 회원으로 일제 강압으로 의생으로 격하되었을 때 서울대회에 참석하고 적극 반대운동을 펼쳤다”


■ 1924년 이후 의생들= 제주의생회 창립 이후 일제시대 40여명의 한의사(의생)가 있었으며 30년대에 ‘한의사 도태정책’에 의해 20여명이 현직에 종사하였다.

좌임관 선생 기념비.
1924년에 부상규(의생 7105번), 박맹선(의생 7160번) 장봉익(의생 7175번), 홍순익(의생 7176번), 김광현(의생 7230번)이 면허를 취득하였고 25년에는 박시민(의생 7431번)이 27년에는 현재탁(의생 7693번)이 29년에는 김중화(의생 8003번)가 31년에는 강봉희(의생 8160번)가 32년에는 좌임관(의생 8345번)과 김대홍(의생 8368번)이 33년에는 최제두(의생 8439번), 김시탁(의생 8440번), 김형영(의생 8500번)이 1936년에 김덕환(의생 8775번)이 38년에는 신상근(의생 9074번)이 39년에는 안요녕(의생 9186번), 이사옥(의생 9187번)이 면허를 받았다. 40년 이후는 창씨개명을 했는데 ‘신농임’과 ‘도촌기선’이 있고 의생면허는 잘 모르지만 한의학 잡지에 있는 고지규 등도 제주도 의생으로 활동하였다.

■ 일제시대 의료현황(1936년~37년)= 제주도에는 도내 의료기관으로 1912년 제주읍에 설치한 도립의원 외에 서귀면, 성산면, 한림면에 각각 公醫를 두었고 기타 각지에 한의사에 해당하는 醫生을 두었다.

일제시대 제주도민의 인구는 36년 196,744명이며 19년의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제주도 상주인구는 20만명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6년의 자료에 의하면 在外 도민은 약 50,000명이 있는데 일본의 大阪(오오사카)에 72%에 해당하는 36,000여명이 거주한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그 당시에 정기 운항선이 오오사카에 귀선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제주도 관련 한의사들의 출신 학교가 오오사카와 관련된 것도 이와 연관된다. 











이상에서 보듯 제주도의 의료는 한의사가 많은 부분을 담당하였다.

“부상규는 ‘한라산 박사 부정휴(제주도 왕벚나무 관련)’의 부친으로 제주 세화교회의 설립에 남다른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일제시대에는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제주도는 일본 58군사령부가 있었으며 일제시대 식민지정책으로 인해 굶주림으로 인한 만성소모성 질환이 많이 발생하였는데 폐결핵과 각기가 질병의 많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또한 제주도에 수인성 질환의 전염병의 이환율이나 사망률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제주도는 김성묵(경성의원), 김태민(장춘의원), 차남수(차남의원), 오창흔(후생의원)과 강봉희(제성한의원 : 애월), 좌임관(삼성한의원 : 고산), 변태우(보창한의원 : 모슬포), 김대홍(자성한의원 : 세화) 등이 있었다.

■ 1950년대 초기 한의사= 제주도를 말하면 1948년 4.3사건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는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1908년에서 1916년까지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농민들이 대거 농토를 잃고 빈농이 되었다. 이후 논농사를 짓지 못하고 거센 바람과 척박한 환경이 제주 사람들을 일본으로 몰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1922년 ‘자유 도항제’를 통해 일본으로 대거 이동하였다. 실제 당시 제주 인구의 1/4이 고향을 떠나 일본에 살게 되었고 지금도 제주도민의 상당수가 일본에 거주하는 것 또한 이런 당시 시대사의 비극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20만명인데 해방 후 일본에서 귀향한 6만명의 인구가 갑자기 늘어났고 1948년 4.3사건 후 30만명이던 인구 중 3만명의 인구가 없어지게 되었다. 1918년 법정사 항일투쟁, 제주도 기미 만세운동, 32년 제주 해녀 항일운동은 언급하지 않아도 제주도민은 다 아는 항일운동이다. 하지만 근대사의 큰 사건 이후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로 했던 것 같다. <계속>

황연규/ 마산 성신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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