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456)- <오주연문장전산고>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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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456)- <오주연문장전산고>②
  • 승인 2010.06.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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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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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驗과 辨證으로 점철한 學究熱

 

 

고의서 산책(456)- <오주연문장전산고>②
體驗과 辨證으로 점철한 學究熱 

 

 

 

 

 

오주 이규경이 어떻게 이런 훌륭한 저술을 남겼으며, 무슨 이유에서 방대한 지식체계를 구축하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 책에 집적된 지식정보가 그저 지적 유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삶의 문제에 대한 고뇌의 결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지면을 할애한 곡식에 대한 변증설이나 辟穀, 그리고 의학에 대한 변증 등은 45세 전후로 10여 호 남짓한 시골마을이던 公州牧 白橋洞에 들어가 은거생활을 시작하여 줄곧 궁벽진 삶을 일관했던 그의 생애와 무관하지 않다. 인가가 거의 없는 외진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그에게 새로운 곡식, 구황작물, 벽곡, 그리고 응급처치에 대한 관심은 서울의 번잡한 곳에서의 생활과는 색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821년에는 식솔들을 모두 거느리고 舒川의 鳳巖里로 이사하게 된다. 그가 도중에 定山 雞鳴峴의 굴 속에서 이른바 白麪土라는 먹을 수 있는 흙을 구하여 직접 먹어보게 된다. 아이티의 난민들이 진흙쿠키를 만들어 먹는다는 보도에 경악했던 우리에게도 왜란을 겪으면서 산골짜기 암굴 속에서 食用土를 구해 연명하였던 사실이 전하는 것이다(水土續辨證說).

또한 이 해에는 치료법을 알 수 없는 怪疾(콜레라로 추정)에 의해 關西 平壤府에서 수만 명이 사망하였으며, 王都 五部에서 13만 명이 사망하였다. 그해 겨울 茶山 丁若鏞이 중국의 금석학자 葉志詵에게서 이 병에 대한 처방을 얻었는데, 병명을 ‘硃砂疔’ 혹은 ‘心經疔’, ‘麻脚瘟’이라 불렀다. 이규경은 이때부터 이 병에 대한 처방을 두루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훗날 <霍痧會要>라는 책으로 묶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이 책은 전하지 않는 듯하다. 여하튼 그는 유행성 전염병에 대해 유효 처방을 채록하고 경험을 抄錄하는 행위를 통해 기민하게 대응하였음을 보여준다.

45세 은거생활 시작… 궁벽진 생애와 함수관계
養德‧ 養身, 醫道… 土亭 服氣法 활용 질병 치유


중년기에 들어 그는 산골에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각종 곡식에 대한 변증설 뿐 아니라, 곡식을 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논한 <辟穀辨證說>, <雪芥墨應耳辨證說>, 산야에서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山野荒政辨證說> 등이 지어졌다. 또한 실제로 새로운 곡물이나 구황작물을 직접 심어서 수확해 보기도 하였다. 이렇듯 곡식에 대한 관심은 식량에 대한 자급자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궁벽진 곳에서의 절실한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나아가 산골오지에서의 생활은 먹거리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게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질병과 의료의 문제이다. 그는 조선에서 崇品에 이른 太醫마저 종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할 정도로 의방서나 의학을 천시하는 세태를 한탄하면서, 시골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게 된다면 반드시 의술을 익혀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爲人子當學醫辨證說).

또한 養德과 養身을 하나의 道로 파악하여 醫道의 정당함을 확신하였던 그는, 세상의 의서들이 너무 허번함을 지적하고 실생활에 필요한 의서로 영남 儒生 林氏가 지은 <醫鈔>를 꼽았다(濟生三妙辨證說). 뿐만 아니라 土亭 李之菡의 <服氣問答>에 나온 服氣法을 직접 시험해본 결과, 자신의 고질병을 치유하였다고 술회하였다(氣治神治辨證說). 이와 같이 의학에 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실천양상은 “이 골짜기에 살면서 醫道에 유념했었다”는 언급처럼 궁벽한 지역에서 고질병을 앓고 있던 그에게는 매우 절실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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