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2)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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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2)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⑦
  • 승인 2010.06.2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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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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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방유취의 완성과 의의 

국가의 크고 중요한 사업일수록, 사업기간이 길고, 또 예상치 못한 여러 정치‧사회적 문제들과 맞닥뜨려야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의 <의방유취>의 간행도 그러했던 것처럼 보인다. <향약제생집성방>과 <향약집성방>을 간행할 때만 해도, 전문가 집단이 기술 집약과 시간 단축을 통해 단시간에 마친 반면, 국가의료 DB 구축의 의미를 갖는 <의방유취>의 사업은 국가 최고위층이 직접 관여한 대신 우여곡절이 많았다.

자세한 내막이 전해지지 않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현존하는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도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도 세종 27년(1445) 10월27일 <의방유취>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보고할 때만 해도 곧 간행될 것 같던 이 책은 결국 당대에 간행되지 못하고 성종 8년(1477)에 가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조선왕 5대조 34년에 걸친 긴 시간이다. 그동안 사건사고도 적지 않았을 터인데, 세조 10년(1464) 1월에는 <의방유취> 교정부실을 문제 삼아 74명의 관료가 징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정말로 이 책의 교정이 문제가 되어서 발생한 사건일까? 아니면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엮인 것일까? 어쨌거나 대외적으로는 <의방유취> 편찬 과정에 가장 큰 파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기록된다.

<의방유취>의 간행 과정에 가장 깊이 관여한 군왕은 세조이다. 세종의 2남으로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 7대 왕이 되는데 수양대군 시절부터 정치에 참여했던 정치적 야심이 강했던 인물이며, 직접 <의약론醫藥論>을 저술하는 등 의학에 대해서도 조예도 깊고 관심도 많던 군왕이다. 세조는 5년(1459) 9월1일에 정치 귀감서인 <치평요람 治平要覽>과 의서인 <의방유취> 중에 어느 것을 먼저 간행할는지 논의하는 자리에서 세조는 주저없이 <의방유취> 간행을 먼저 하라고 지시한다.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것이 분명한 <의방유취>는 중국에도 없는 당송 이전의 의학문헌이 고스란히 담긴 고대 동아시아 의학문헌의 보고다”


그러나 그 자신도 <의방유취> 간행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말았고, 그의 뒤를 이은 예종은 병약해 1년을 채우지 못했으며, 나이 어린 성종에게 제위를 물려줘야 했다. 성종은 어린 나이에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다가 성종 6년(1475)에 수렴청정을 마치고 스스로의 정치행로를 시작한다. <의방유취>는 그가 섭정을 마친, 바로 그 해에 간행을 시작하는데, 성종의 국왕으로서 첫 국가사업이 <의방유취>의 간행인 셈이다. 3년 뒤인 1477년 금속활자 을해활자본으로 된 <의방유취> 266권 264책 30질이 간행되었다(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에 이어 또 하나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것이 분명한 <의방유취>는 이렇게 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불행히도 이 책은 국내에 남아있지 않고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약탈해간 1질이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남아있다(국내에서는 201째권 단 한권이 발견되어 보물 1234호로 지정됨). 당대 조선 정부가 심혈을 기울인 사업인 만큼 현재적 가치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조차 남아있지 않은 당송 이전의 의학문헌이 고스란히 담긴 고대 동아시아 의학문헌의 보고로서, 이 책 없이 동아시아 의학문헌을 연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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