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20)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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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20)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⑤
  • 승인 2010.06.1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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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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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의학의 종식과 <의방유취>의 간행 

우리나라 굴지의 자동차회사들도 처음부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아니고 초기 공업사 시절이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부품을 만들어 완성차에 공급하다가, 부품 제작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면 조금씩 완성차 제작에 대한 욕심을 내게 된다. 조선조 한국한의학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유사한 과정이었던 듯싶다.

한반도에서 자생한 우리나라 토착의학이 나름의 우수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선진국이던 중국권의 의학기술과는 다소 격차가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고려 말에서 시작하여 조선 초에 완성되는 향약의학은 그러한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한 과정으로 평가한다. 중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우수한 의학기술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부품 자립이 필요했던, 것처럼 약재의 수급을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어야 했다. 삽주뿌리가 白朮이 되고 도라지가 桔梗으로 되는 단순한 과정에서부터 궁극에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나서야 국산 단삼, 방기로는 단삼과 방기가 포함된 중국 처방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까지, 국내에서 자생하는 약재로 쓸 수 있는 중국처방의 한계를 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향약 용어의 종식은 12세기부터 시작된 약재 자립화가 이제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는다 걸 의미”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황, 계지, 황연 등 몇 가지 주요한 약재의 국산화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1433년 700여종의 국산약재를 가지고 운용할 수 있는 959종의 병증 및 10706종의 처방을 기록한 <향약집성방>은 부품의 자립화 정도가 완성차 욕심을 낼만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책을 끝으로 조선에서는 더 이상 향약(鄕藥)이라고 이름 붙은 의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향약집성방>이 후대 몇 차례 다시 간행되기도 하고, 언해본이 간행되기는 하지만, 이제 새로운 의서를 만들면서 향약이라고 이름 붙이는 추세는 여기까지였다(김남일, 경희대학교 의사학교실).

중국의 수입약재와 구별한다는 강한 의미를 담고있는 향약이라는 용어의 종식은 중국의학을 본격적으로 수입하기 시작한 12세기부터 시작된 약재의 자립화가 이제 더 이상의 이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국산약재 700여종의 규모라면, 어떤 중국의학의 치료처방도 충분히 응용해볼 수 있겠다 라는 자신감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해서 약재의 국산화 노력까지 종식된 것은 아니다. 이후에 나오는 거의 모든 한국의서는 토산약재에 대한 명칭과 해설을 빼놓지 않고 있다. <동의보감>도 그렇고 <광제비급>도 그렇고 <급유방>도 그렇다. 그리고 그 이후에 늘어난 향약약재도 적지 않다. 다만 의학계의 최대 이슈가 ‘국산약재 개발’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후의 의학계의 최대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세종27년(1445)의 <의방유취>간행에 관한 기사는 그 중심점이 ‘의학기술의 자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완성차를 만드는 과정이 부품을 이어붙이는 것 이상의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듯이, 중국의학보다 뛰어난 최소한 버금가는 의학기술 자립을 위해서는 의학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약재의 국내 수급을 일단락지은 의료정책 입안자들은 그 점에 주목했고 ‘기존의 치료기술을 분류해서 모으는(醫方類聚)’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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