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담론은 개혁주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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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담론은 개혁주의 산물
  • 승인 2010.06.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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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이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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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없는 과학화’ 진정한 개혁인가
정체성 담론은 개혁주의 산물
한의학 과학화 50년 이상 지속된 작업 

필자는 지난 칼럼들에서 지금의 한의학 연구와 임상이 한의학의 특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른바 현대 한의학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 제기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한의학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주장 자체를 지금의 한의학을 내경이나 동의보감 시대로 돌려놓자는 의미 정도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를 한의학의 개혁을 가로막는 수구주의자들의 대책 없는 반대로 낙인을 찍고 있다.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로 자처하는 이들은 과연 어떤 방식의 한의학 개혁을 생각하고 있을까? 넓게 보면 한의학의 과학화나 현대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좁게 보면 이들의 표현대로 ‘특수 언어’로 기술된 한의학을 ‘일반 언어’인 서양의학 지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한의사들이 KCD를 사용해야 하고 한의학 임상과목 강의시간에 적어도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할애해서 서양의학 지식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한의학의 과학화, 현대화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해방 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 50년 이상 지속된 이 같은 작업을 지금도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대세가 되어 어느 몇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정체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이런 흐름을 되돌리고 개혁을 가로막는 수구주의적 책동 정도로 본다면 이것은 시대를 크게 잘못 읽고 있는 것이 된다.

한의학 없는 과학화 진정한 개혁인가
타자와 관계서 차이 독특함 추구해야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지금의 한의학 연구와 임상이 초래하고 있는 오류나 부작용 때문이다. 지금 이뤄지고 있는 한의학의 과학화, 현대화는 한의학의 서양의학화, 보완대체의학화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廢醫存藥” 성격을 띠고 있으며 ‘한의학’ 없는 한의학의 과학화로 가고 있다. 이것은 한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수단으로 빌려온 자연과학적 방법과 서양의학 지식이 정작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한의학적 컨텐츠를 압도해서 생긴 현상이다.

두번째 이유는 한의학, 한의사들의 미래 경쟁력이다. 한의사는 한의학 전문가이지 서양의학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가 진료실에서 KCD를 쓰고 서양의학 지식으로 환자들에게 설명한다고 해서, 또한 밤낮을 잊고 실험실에서 일한다고 해서 우리가 서양의학 전문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니라도 서양의학 전문가들은 넘쳐나고 있으며, 서양의학 지식으로는 그들과 경쟁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한의학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한의학 전문가다. 이런 상황이 면허를 통합한다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라는 정치철학자는 다원성(plurality) 원리를 기초로 정체성 개념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타자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고 경계 짓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는 정체성 개념은 낡은 것이다. 한의학의 정체성 담론은 타 의학체계와 관계 속에서 한의학의 고유성을 발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이것은 의학 전체의 관점에서 한의학이 전체 의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한의학은 한의학의 고유성을 통해서만 전체 의학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렌트는 ‘차이’는 다원성을 위한 선행조건이며, ‘독특함’은 “차이의 능동적 실현”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고, ‘구별한다(differentiate)’는 것은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창조적 행위라고 했다.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바탕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함을 만들어 가는 창조적 행위다. 한의학의 정체성은 미래로 열려있다.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것이 정체성 담론의 진정한 목표다.

이충열/ 경원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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