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19)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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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19)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④
  • 승인 2010.06.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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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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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집성방의 간행

“세종조 의료정책 입안자들은 <향약집성방>을 통해 향약의학이 국가의료 기반이 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도 잊지 않았다”

조선은 세종조에 확실한 정치 안정을 토대로 과학‧ 학술,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대규모의 국가사업을 시행하였고, 의학에도 각별한 관심을 두었다. 한국 한의학의 4대 의서 가운데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의방유취 醫方類聚> 2개가 이미 세종조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한국 한의학에서 세종조가 갖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향약집성방>은 세종13년(1431)에 권채(權採) 유효통(兪孝通) 노중례(盧重禮) 박윤덕(朴允德) 등이 편찬을 시작하여 세종15년(1433)에 완성되어 간행되었다. 1398년 <향약제생집성방> 간행 이후 35년만에 다시 국가 주도 향약의서를 간행한 것으로, 그 기간의 왕성한 연구성과를 반영하듯이 <향약제생집성방>보다 약 3배가량 늘어난, 959종의 병증과 1만 706종의 처방 및 1,416종의 침구법이 실려 있는 명실상부한 조선 초기 한국 한의학을 집대성한 의서다. 고려 말기 인쇄술의 발달과 중국의학의 수입으로 촉발된 한국 한의학의 새로운 흐름은, 새로운 국가 질서를 추구하는 조선 정부의 범국가적 정책 지원에 힘입어, 불과 수십 년만에 당대 의료기술의 집대성이라는 거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세종조의 의료정책 입안자들은 <향약집성방>을 통해 정리된 향약의학이 명실상부한 국가의료 기반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별도의 정책적 배려도 잊지 않았다.

첫째로는 국산약재 감별이다. 여말선초의 향약의학 형성 중에, 상당수의 중국 처방들이 한국의료 기술로 편입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름은 같지만, 약재의 종류나 효능이 다른 경우가 발생하는데,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었다. <세종실록>의 1423년 3월22일 기사는 김을현(金乙玄) 노중례 등의 건의에 의하여 국산약재 중에서 단삼, 방기 등의 수종의 약재가 중국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아예 쓰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있다. 이외에도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마다 의원을 보내 약재 감별을 했고, 중국에서 구입해온 약재는 시험재배기관(種藥田)에서 재배하여 국산화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둘째로는 지리지 간행을 통해 전국에 분포된 약재의 산지와 재배지 등을 조사했다. 1425년에 <경상도지리지>를 필두로 1432년에 완성된 <팔도지리지>는 군현 단위 별로 정리된 약재의 산지와 재배지를 자세히 기록해, 국가의료를 위한 약재 수급을 정책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1428년에 간행된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은 약재의 채취 시기와 수치법에 대한 안내책자로, 약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약재관리 지침서를 정부가 주도하여 간행하고 배포한 것이다.

국산약재 감별과 약재의 전국 분포 자료조사, 약재관리 지침서 간행 등 세종조에 실시된 정책은 <향약집성방> 간행이 단순한 의서 간행 이상의 국가 주도 의료사업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미 조선 개국과 더불어 ‘鄕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이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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