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18)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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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18) | 조선의 의료정책 100년 대계③
  • 승인 2010.05.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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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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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생원과 향약제생집성방 

1397년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는 제생원 설치에 대해 “제생원(濟生院)을 설치하고 각 도로 하여금 매년 향약재(鄕藥材)를 실어다 바치기를 혜민국(惠民局: 혜민서의 전신)의 예와 같이 하였다”라고 전한다. 빈민구료를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제생원은 여말선초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 늘어나 빈민과 행려병자들을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특별이 이들에 대한 인권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체제기반이 아직 불확실했던 조선 정부의 대민 의료정책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이 기구는 조선 개국 초기에만 잠시 기능을 하다가 조선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든 1460년에 지금의 국립의료원에 해당하는 혜민서로 통합된다.

이 제생원의 설치와 관련하여 필자가 주목하는 내용은, 이 기구의 설치를 건의한 김희선(金希善 ?~1408)이라는 인물과 그리고 그가 주도해서 간행한 조선조 최초 관찬의서이자 제생원의 진료지침서의 성격을 갖는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의 간행이다.

김희선은 태조2년(1393) 전라도 안찰사 시절에 의약교육기관 ‘의원’의 설치를 주도함과 동시에 조선조 의학정책의 기틀을 ‘향약의학(鄕藥醫學)’으로 삼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몇년 후인 1397년에는 좌정승 조준(趙浚)과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의 도움을 받아 제생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398년에 그는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향약제생집성방> 간행을 주도하였다. 1395년에 중추부지사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호조판서까지 역임한 그는 명실상부한 조선 개국정부의 핵심인사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의료정책의 100년 대계를 세운 실질적인 공로자를 꼽을 때 첫번째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향약제생집성방은 향약집성방의 모태가 되고 혜민서‧제생원 등 국가 의료기관의 진료지침서로서 손색이 없다”


김희선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초 의료정책자들은 태조2년 의학교육기관을 각 도에 설치하면서 <향약혜민경험방>을 주요 텍스트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고려말에 간행된 이 의서는 규모나 내용 면에서 국가 의료정책을 뒷받침할만한 정도는 아닌 듯한데, 바로 5년 뒤인 1398년에 <향약간이방 鄕藥簡易方>을 근간으로 해서 여기에 <본조경험방 本朝經驗方>과 <비예백요방 備豫百要方> 등의 의서를 참고하여 1398년에 <향약제생집성방>을 간행하면서, 빠르게 기존 지침서를 대체해 간다(안상우, 민족의학신문 ‘고의서산책’ 291, 292호).

김희선이 주도한 일련의 과정들은 개국 이래로 국산약재 기반의 ‘향약의학’을 국가 의료정책의 중심축으로 정하고 그에 필요한 의료인력을 양성, 진료지침서 선정, 구료정책 시행, 진료지침서 증보 등 일련의 제반 조치들을 착실하게 시행해간 느낌이다. 이 <향약제생집성방>은 다시 30여년 뒤에 3배 이상 늘어난 규모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1433>이 간행됨으로서, 완성본이 아니라 과도기에 있던 의서가 되고 말았지만, 간행 당시는 총 30권의 분량으로 병증 수가 338개, 치료처방이 2803수였다고 전해지고, <향약집성방> 간행의 모태가 때문에, 혜민서와 제생원 등 국가 의료기관의 진료지침서로서 손색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차웅석/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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