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HISTORICA한국사(고구려+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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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HISTORICA한국사(고구려+백제)
  • 승인 2010.03.2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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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균

김홍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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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최대 네트워크 ‘중원’ 위협하다
동북아 최대 네트워크 ‘중원’ 위협하다
고구려‧ 백제 의학수준 국제적… 의료제도 완비

HISTORICA한국사(고구려+백제)
히스토리카한국사 편찬위원회 지음. 이끌리오 刊.


예맥족(濊貊族)은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발전하여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중국의 쑹화강(松花江) 및 헤이룽강(黑龍江)과 압록강․두만강 유역 및 한반도 북부 지역인 함경도․강원도 등지에 걸쳐 살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갔다. 이 가운데 부여(扶餘)계의 진출은 눈부셔 동으로 말갈과 읍루를 지배하고 옥저와 동예를 형성하였다. 또한 남으로는 한나라에 의해 빼앗겼던 고조선의 자리를 차지하며 성장한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지면서 마한을 병합하여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북쪽으로 동호(東胡)와 함께 예맥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숙신(肅愼)을 병합하고, 서쪽으로 현도(玄菟)와 요동을 정벌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연합하여 변한에 의해 공급되던 낙랑을 비롯한 임둔(臨屯)․대방(帶方)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이들을 협공하여 복속시키니,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네트워크는 중원을 위협하는 사상 최대의 판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700년 고구려(B.C37~A.D668)와 백제(B.C18~A.D660)의 역사는 부여계의 정통성이 확보되는 문화적 계통을 이어가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을 과시했던 찬란한 문명을 계승해왔다. 그리하여, 동북아 최강의 위치에서 독자적 문화를 일구어왔던 지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의학적 지식기반도 당연히 확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을 배경으로 한 <단군신화>에서 '곡식과 수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하고 쑥과 마늘을 사용했다'는 얘기는 단순히 원시적 의학 수준을 알려주는 정도가 아니다. <후한서>에서 '군자국(君子國)'이니 '불사국(不死國)'이니 지칭하였듯이, 국가의 체계가 정비되고 민생이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군자국'이라 지칭하였고, 이에 따른 의학에 관한 지식이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형성되었기에 '불사국'이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날 전해지는 <신농본초경>, <명의별록>, <신수본초>, <증류본초>, <본초강목> 등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약재들이 기재되고 있음도 그러하거니와, <외대비요>에 기록되고 있는 <고려노사방>이나 <의심방)>과 <의략초>에 기재되어 있는 <백제신집방>의 ‘폐옹방’과 ‘정종방’은 오늘날 임상에 적용한다 하더라도 탁효를 볼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신효한 처방들이다. 비록 이들 의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중국문화의 최성기에 해당하는 당나라 왕도(王燾)가 귀한 신분에게 쓰이는 ‘노사(老師)’라는 존칭을 써가면서 <외대비요>에 기록하였다는 것만 봐도 당시의 고구려 의학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겠다.

또한 <백제신집방>도 ‘신집(新集)’이란 단어에서 ‘새로 찬집하였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미 그 이전에 이러한 수준의 의서가 출간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고구려의 시의(侍醫)나 백제의 약부(藥部), 의박사(醫博士), 채약사(採藥師), 주금사(呪噤師) 등의 용어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미 의료제도가 완비되었음을 뜻하니, 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체제가 정비됨과 아울러 당시 의학 수준 또한 국제적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의학사의 연구가 부진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값 3만8천원.

金洪均/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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