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역 한의계 열전(1)- 5인 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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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 한의계 열전(1)- 5인 동지회
  • 승인 2009.12.30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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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수 김시영

신현수 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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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계 허무맹랑한 주장… 전략적 사고로 무력화
국민의료법 제정과 한의사제 부활
신현수

양의계 허무맹랑한 주장… 전략적 사고로 무력화

부산 지역 한의계 열전(1)- 5인 동지회

오늘날 약 2만 명의 한의사와 부산 한의전을 포함해 전국 12개 한의대 재학생들이 각종 한의 관련 의료법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5인 동지회’ 선배님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투철한 사명감 덕분이다. 만일 5인 동지회가 없었더라면 한의학이 어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한의사협회 40년사를 중심으로 5인 동지회의 공적을 간략하나마 되돌아본다.

5인 동지회는 1951년 1월15일 부산 피난 국회에서 국민의료법 제정을 둘러싼 논의가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김시영
결성됐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일제의 조선 의료령은 폐기되지 않은 채(한의사가 의생으로 격하) 엄연히 존속했다. 이에 정부는 1950년 2월 보건의료행정법 안을 국회에 내놓았다.

이 보건부안 제1장 총칙(의료인)에는 의사/치과의사 제도만 담겼을 뿐 한의사 제도가 없었다. 사실상 한의 말살, 양의 단일 법안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한의약계가 강력히 반발했고 한의약계의 유일한 대변자였던 조헌영 의원에 의해 한의 말살 양의 단일 법안은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헌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돼 50년 5월30일 제2대 총선이 치러지고 6월19일 제2대 국회가 개원됐으나 개원 일주일도 안돼 한국전쟁이 터져 국회는 부산으로 옮겨왔다.

“제2대 국회 역시 한의사제를 없애거나 한의사를 의료기사 수준으로 격하시키려 들었다. 부산의 5인 동지회는 생업을 팽개치고 불철주야 대국회 투쟁에 나섰다”

이때 정부는 국민의료법 안을 국회에 다시 상정했다. 이번에도 한의사 제도가 제외된 사실이 알려지자 부산에 거주하던 한의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한의약회가 한의사 제도의 법제화에 앞장을 섰다(당시 전국 규모의 한의사협회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한의약회의 주요 회원은 李羽龍(이우룡), 權義壽(권의수), 禹吉龍(우길룡), 尹武相(윤무상), 鄭源喜(정원희)였다. 후세 한의사들은 이 분들을 5인 동지회라 부른다.

다섯 분의 활약은 필설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대단했다. 우리의 전통의학이자 민족의학인 한의학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었고 심지어 의생(醫生)으로 강등 당하는 수모까지 당했는데, 이제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독립된 상황에서도 정책적 배려를 받기는커녕 복권조차 이뤄지지 않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국가 의료정책 수립의 과실이 분명하고 정부 지도자의 올바른 국가관 결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제헌국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의학은 그 바람에 정부의 핵심 의료정책에서 항상 소외됐다. 보사부가 국민의료법 제정(1950년 2월)을 예고하면서 의사와 치과의사 제도만을 포함시키고 한의사를 배제하자, 제2대 국회 역시 1안으로 한의사 제도를 없애는 것. 2안은 한의사 자격을 의료기사 수준으로 격하시킨 안을 국민의료법으로 제출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한국전쟁이란 곤궁한 처지에서도 부산의 5인 동지회는 생업을 팽개치고 불철주야 대국회 투쟁에 나섰다.

투쟁방식은 다양했다. 우선 국회 증언에 적극 나섰고 둘째는 각 언론사를 통한 홍보였으며 셋째는 학생을 동원한 시위였다(당시 부산에는 동양의학전문학원이 있었다. 학생회장, 김영진). 투쟁효과는 점차 높아졌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리했다. 당시 행정부의 장/차관, 국/과장이 모두 양의사였고 국회의원도 양의사가 4명이나 됐다. 반면 한의사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5인 동지회와 학생들은 아주 조직적이고 치밀한 활동을 통해 국회위원들의 마음을 민족의학인 한의학을 살리는 쪽으로 분위기를 끌고가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5인 동지들께서는 부산의 엿장수를 동원해 정부의 고위 인사와 국회의원 집에서 한약 약탕기를 돈을 주고 수거해 국회 안에서 한의학 관련 전시회를 열었다는 전설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우여곡절 끝에 5인 동지회는 결국 국민의료법(의료인에서 한의사와 의료기관에서 한의원과 중앙회인 한의사협회가 있게 된) 제정을 쟁취해 냈다.

여담이지만, 수정 발의에 나선 국회 보건사회 분과 위원장인 안동 출신 김익기 의원과 의장이던 신익희 의원에게는 우리 한의계가 두고두고 감사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시 양의사 측은 한의사 제도를 말살하기 위해 ▲한의학은 비과학적이고 가치 없는 의학이며 후진 의학이다 ▲서구 선진국에 없는 제도이니 한의사 제도는 국가적인 체면 손상이다 등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삼았다. 반면 한의사 측은 ▲한의학은 임상치료에 있어 양방치료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한의학은 전통의학으로서 민족의 정통성이 담겨있고 동의보감에서 사상의학까지 발전해 왔다 ▲중국에서 보듯이 한/양의가 충돌하면 국민건강에 혼란이 오고 서로의 장점을 흡수 발전하면 국민보건의 장래가 보장된다는 주장으로 맞대응했다. 한/양의계 논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작금의 한의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08년 3월 대의원 총회는 국민의료법 쟁취를 기려 5인 동지회 공적비 건립을 의결했다. 뒤늦게나마 공적비 건립이 추진되니 다행이다. 역사는 무섭고 엄정하다”

2008년 3월16일 제53회 대의원 총회는 5인 동지회 공적비 건립을 의결하고 구체적 진행을 집행진에 위임한 바 있다. 한의계 인사들은 이에 대해 “5인 동지회 선배님들의 투철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미욱한 후학들 때문에 과거 속에 묻혔다가 공적비 건립을 계기로 다시 빛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비록 시대는 다를지라도 한의학에 대한 선배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미래 한의학을 개척해 나가는 이정표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입을 모았다. 역시 역사는 엄정하고 무섭다.

시대와 환경이 변했으나 한의학의 의권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만일 5인 동지들께서 지금 살아 계신다면 위기에 처한 한의계 현실을 무시한 채 생업에만 몰두하는 후배들에게 무엇이라 일갈할 지 사뭇 궁금하다. 5인 동지회의 역사추모는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나마 이제라도 공적비 건립이 추진되니 다행이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내일을 기약하기 어렵다. 한의학도 마찬가지다. 작금의 한의계 상황은 5인 동지회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투철한 사명감, 열정을 더욱 그립게 한다.

신현수/ 한의협 대의원 총회 예결산 분과 위원장
김시영/ 한의협 대의원 총회 토의 안건 및 정관 개정 분과 위원장

100101-기획-기고-5인동지회-국민의료법-공적비-신현수-김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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