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 History(3) | 중국의학의 한국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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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 History(3) | 중국의학의 한국 전래
  • 승인 2009.11.0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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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웅석

차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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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베트남은 중국의학과 토속의학을 접목해 독자적이고 수준 있는 의학 풍토를 만들어 냈다”

하버드대 옌칭연구소(Yanching Institute)는 北京의 옛 이름인 燕京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원래는 이름이 동아시아연구소였다. ‘옌칭’을 이름으로 한 것은 아무래도 동아시아 하면 중국이 대표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옌칭연구소는 중국에 관한 사료 뿐 아니라 중국관, 일본관, 한국관, 베트남관 4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고, 각 나라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상당량의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4개의 나라가 중국의 문화권이면서도 나름대로 특색 있는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는 하버드의 동아시아 전공학자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 고대 중국의 주변 국가는 모두 중국의 영향력 속에서 자신의 문화를 형성해 왔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과 일본, 베트남 3국은 중국의학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원래 토속의학을 접목하여 점차 독자적이고 수준 있는 의학 풍토를 만들어 낸 유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계가 아주 일방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최소 10세기 이전은 중국의학 자체도 주변 문화권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의학의 내용을 풍요롭게 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였던 한반도 일대의 고대국가들과는 의학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전해주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고대 중국의 의학문헌에 보이는 東夷, 樂浪, 百濟, 高麗(고구려의 당시 명칭), 新羅 및 한반도의 여러 지명은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경사증류대관본초>의 ‘오미자’ 조문에는 “지금 일등급은 고구려에서 나는데 살이 많고 시고 달다, 그 다음 등급은 靑州와 冀州에서 나는데 신맛이 지나치다, 씨앗은 돼지콩팥 모양이다. 또 建平에서 나는 것도 있는데 살은 적고 씨앗은 고구려의 것과 다르고 맛은 쓰다”고 하였다. 이것을 비롯한 다른 많은 기록은, 당시 중국과 약재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며, 우리 민족의 의학이 고대 중국의학의 저변을 형성한 당당한 한 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중국의학이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주장을 펼 때 빠지지 않는 고대기록이 한 가지 있다. <二十五史>의 ‘周書’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561년에 중국 吳나라의 왕족 知聰이 <內外典> <藥書> 및 <明堂圖> 등 164권을 가지고 고구려에 왔다가 이듬해 지총은 이 책들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의학을 전파한 공을 인정 받아 和藥使主의 칭호까지 받아 일본에 대대로 정착하였다”는 내용인데, 일부 학자는 중국의 방서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해진 최초의 사건이라고 기술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해 ‘최초’ 라고 강조하는 이면에는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필연적으로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의식이 깔려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차웅석/ 경희대학교 한의대 의사학교실

091111-칼럼-중국의학-옌칭연구소-차웅석.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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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효 2010-07-02 13:45:10
중국의학이 한국에 전래된 기록이 <이십오사>의 '주서'에 나타나 있다고 하지만, 실제 해당 문헌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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